인문과학 남송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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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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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남송사(南宋詞)
1.정치 사회상의 특징
1126년 금나라 군대가 송의 수도 변경을 함락시키고, 다음해 휘종ㆍ흠종과 후비ㆍ태자ㆍ종척들 3000여 명을 북쪽으로 잡아가자, 휘종의 아홉째 아들 조구가 남경에서 즉위하여 고종(高宗)이 되니 여기에서 남송은 시작된다. 송은 중원 땅을 모두 금나라에게 내주기는 하였으나 한세충(韓世忠)ㆍ악비(岳飛)같은 장수들의 분전으로 계속되는 금나라 군사의 남침을 막아 강남은 평안을 누릴 수 있었다. 그리고 진회(秦檜)를 영수로 하는 화의파(和議派)와 한세충ㆍ악비의 주전파(主戰派)가 대립한 끝에 소흥(紹興) 11년(1141)에 악비가 죽자 남송은 금나라에 칭신하고 은과 비단 가 25만을 바치며 명맥을 부지하였다. 그리고 송ㆍ금 두 나라가 오랜 동안 싸우고 있는 사이에 북쪽엔 다시 몽고족이 일어나 아시아는 물론 유럽까지도 진동시키는 형세로 크고 있었다. 이에 송나라는 몽고와 연합하여 금나라를 멸하였으나 오래지 않아 송 덕우(德佑)2년에 송나라도 몽고의 침입으로 멸망하고 말았다.
남송은 금나라에 밀려 강남으로 내려와 있으면서도 강화정책으로 일시 소강상태를 유지하여, 강남은 새로운 경제ㆍ문화의 중심지로 발전하였다. 이런 중에도 통치계급에서는 사치를 극한 생활 속에 취생몽사하는 나날을 보내며 현란한 문화를 유지하였다.
2.남송 초기의 사
남송 초기의 문인들에게는 조국의 태반을 외족 금나라에게 빼앗긴 충격이 그들의 작품 속에 깃들여져 있다. 따라서 이때의 사인들은 음률이나 사의 형식을 자세히 따질 겨를도 없이 자신의 격정과 비분을 사에 쏟아 놓았기 때문에 문장이 산문화 또는 백화화(白話化)하는 경향을 보였고 이는 소식의 호방한 풍격이 의 재흥이라고도 할 수 있다. 사의 내용은 애국적인 강개와 비통을 노래한 격정파(激情派)가 있는 반면 소극적인 감상과 한적을 노래한 애상파(哀傷派)가 있었다. 격정을 노래한 작가로는 신기질(辛棄疾, 1104-1207)ㆍ육유(陸游, 1125-1210)를 비롯하여 악비ㆍ장원간(張元幹) 같은 이들이 있고, 애상을 노래한 작가로는 주돈유(朱敦儒, 1080?-1175?)를 비롯하여 섭몽득(葉夢得)같은 이들이 있다. 그러나 훨씬 뒤에도 유극장(劉克莊, 1187-1269) 같은 사인은 초기의 신기질과 같은 격정을 사에 담고 있다.
주돈유 : 그는 현실에 대하여는 초연했으나 망한 나라와 두고 온 고향을 생각하는 슬픔이 있었고 성품이 자유로운지라 자신의 감정을 꾸밈없이 표현하여 독특한 풍격의 작품을 이루고 있다. 사집으로는 『초가(樵歌)』가 있다.
육유(호 放翁) : 중국 역사에서 걸출한 애국 시인중의 한 사람으로 꼽히고 있다. 그의 사는 내용이 그의 시처럼 폭넓지 못하고 풍격도 그의 시처럼 호방하지는 못하나 애국적인 사상 감정을 표현함에 있어서는 기본적으로 같다. 사집은 『방옹사(放翁詞)』또는 『위남사(渭南詞)』라 부른다.
추 파 미(秋 波 媚)
七月十六日晩, 登高亭, 望安南山.
秋到城角哀.烽火照高台.
悲歌筑,高酒, 此悠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