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형(茶兄) 김현승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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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다형(茶兄) 김현승론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다형(茶兄) 김현승은 자신의 호에 ‘茶’를 썼다. 그 이유는 그가 커피를 매우 좋아했기 때문이다. 그는 지인들에게 손수 커피를 타주곤 하였다.
김현승론
1. 생애와 문학 활동
다형(茶兄) 김현승은 1913년 평양에서 목사 김창국의 6남매 중 2남으로 출생하였다. 그는 부친의 첫 목회지인 제주시에서 자랐고, 7세 때 전남 광주로 이주했다. 이후 부친의 뜻으로 형이 있는 평양으로 가서 숭실중학교을 다녔다. 숭실중학교 재학 시절, 기숙사에서 생활하며 문학에 심취하기 시작한다. 졸업 후 숭실전문학교 문과를 다니며, 그곳의 교사로 있던 양주동, 이효석의 강의를 들으며 시 습작에 더욱 몰두하였다.
1933년 위장병 때문에 부득이하게 학업을 중단하고 광주로 내려간다. 복교 후, 교지에 「쓸쓸한 겨울 저녁이 올 때 당신들은」과 「어린 새벽은 우리를 찾아온다고 합니다」등을 발표한다. 위 시들이 양주동의 눈길을 끌어 문예란에 소개되었고, 일반 관행인 신춘문예나 잡지 추천제도와 상관없이 문단에 등단하게 된다. 1935년 과 , 교지 등에 「묵상수제」,「유리창」,「철교」,「이별의 시」등을 발표한다. 이 무렵의 시들은 식민지 시대의 궁핍하고 어두운 시대에서 고통 받는 민족의 비애를 낭만적인 자연예찬과 인간의 탐구정신 속에 녹여내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의 시어들은 깨끗하고 투명하며, 때로는 지나치게 세련되고 지적인 언어를 구사하는 모더니스트의 성향을 보인다.
1936년경 위장병의 재발과 신사 참배 문제로 학교가 문을 닫게 되자 광주로 돌아와 모교인 숭일학교에 교편을 잡는다. 이후 교회 내의 작은 사건이 신사 참배 문제로 과대돼, 청년 수십 명과 함께 사상범으로 잡혀 물고문과 재판을 당하고 교직에서 해고되는 등 고초를 치른다. 이 시절 그의 시작 활동은 현실적 여건에 의해 잠시 중단된다. 몇 년 뒤, 광복과 더불어 에서 잠시 일하다 모교인 숭일학교로 복교하여 교감으로 취임한다. 교육자로 일하며 시작 활동도 병행해 여러 신문과 잡지에 「내일」,「민성(民聲)」,「창」,「조국」,「자화상」등을 발표한다. 1948년 무렵에 서정주, 김동리, 조인현 등과 교류하면서 문단 활동의 폭이 넓어지고 1950년에는 「생명의 날」,「가을 시첩」등을 발표한다. 이때부터 인간의 고독이나 허무 같은 삶의 근원적 문제에 진지한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다. 그는 기독교 정신에서 배태된 높은 윤리성의 실현을 하나의 실존 과제로 삼고 그것을 생명, 순결, 진실 등의 관념 속에 수렴하려는 태도를 보여주었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난 뒤에 광주에서 박흡, 장용건 등과 더불어 계간지 을 창간하고 이듬해 4월에는 조선대학교 교수가 된다. 그러나 자신의 네 살 난 아들이 약도 제대로 쓰지 못한 채 죽는 비극을 겪는다. 이때의 애끊는 경험이 시「눈물」의 바탕이 된다. 1955년에는 한국문학가협회 중앙위원으로 선출되고 제 1회 ‘도문화상’을 수상한다. 1957년에는 그동안의 시들을 모아 첫 시집인 『김현승 시초』를 발간하고 이듬해에 제 1회 한국시인협회 수상자로 결정되나 수상을 거부해 화제가 되었다.
1963년에는 두 번째 시집 『옹호자의 노래』를 간행한다. 그는 여전히 주변과 사물을 투명하게 응시하는 시적 자세를 보이나 갈수록 혼탁해지는 정치 현실에 대해 점점 관심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1964년에는 숭실대학교 교수가 된다. 1968년에 세 번째 시집 『견고한 고독』을 내놓는다. 이 시집에서 그는 신의 불가지성, 무한성, 영원성에 대비되는 인간의 근원적 허무의 자각에서 비롯된 고독의 발견을 노래하였다.
네 번째 시집인 『절대 고독』(1970년)에서도 이 고독의 탐구는 계속되었으며 이즈음 의 추천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시 해설서인 『한국 현대시 해설』(1972)을 간행하였다. 1973년 『김현승 시 전집』을 출간한다. 그 해 3월, 아들의 결혼식을 치르고 나오다 고혈압으로 쓰러져 사경을 헤매다 간신히 회복한다. 이후로는 오로지 신앙에 귀의하여 이따금 신앙시를 쓰거나 병원과 교회를 오가는 생활을 한다. 1975년 4월,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몸으로 다시 강의를 나갔던 그는 숭실대 채플 기독교 계통의 학교에서 행하는 예배 모임
시간에 기도를 하다 쓰러졌고 그 길로 세상을 떠났다. 1975년 11월에는 ‘창작과 비평사’에서 그의 사후 시집인 『마지막 지상에서』를 간행하였고 ‘지식 산업사’가 1977년 3월 다형의 시론 수상 자전적 산문집 『고독과 시』를 엮어내어 출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