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관계에 있어 조선족의 역할과 전망

 1  남북관계에 있어 조선족의 역할과 전망-1
 2  남북관계에 있어 조선족의 역할과 전망-2
 3  남북관계에 있어 조선족의 역할과 전망-3
 4  남북관계에 있어 조선족의 역할과 전망-4
 5  남북관계에 있어 조선족의 역할과 전망-5
 6  남북관계에 있어 조선족의 역할과 전망-6
 7  남북관계에 있어 조선족의 역할과 전망-7
 8  남북관계에 있어 조선족의 역할과 전망-8
 9  남북관계에 있어 조선족의 역할과 전망-9
 10  남북관계에 있어 조선족의 역할과 전망-10
 11  남북관계에 있어 조선족의 역할과 전망-11
 12  남북관계에 있어 조선족의 역할과 전망-12
 13  남북관계에 있어 조선족의 역할과 전망-13
 14  남북관계에 있어 조선족의 역할과 전망-14
 15  남북관계에 있어 조선족의 역할과 전망-15
 16  남북관계에 있어 조선족의 역할과 전망-16
※ 미리보기 이미지는 최대 20페이지까지만 지원합니다.
  • 분야
  • 등록일
  • 페이지/형식
  • 구매가격
  • 적립금
자료 다운로드  네이버 로그인
소개글
남북관계에 있어 조선족의 역할과 전망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남북관계에 있어 조선족의 역할과 전망
= 목 차 =
Ⅰ. 들어가는 글
Ⅱ. 연변조선족 자치주의 전략적 위치와 역할(중요성)
1. 중국소수민족내의 조선족 정책
2. 조선족 자치주 약사와 전략적 중요성
1) 조선족 자치주 약사
2) 조선족 자치주의 전략적 중요성
3. 조선족의 정체성 위기 및 새로운 모색
1) 조선족정체성 위기의 복합구조
2) 새로운 정체성 수립
Ⅲ. 남북한 관계와 조선족
1. 조선족의 남북한에 관한 인식
1) 대 북한관
2) 대 남한관
2. 중국조선족에 대한 새로운 인식
3. 남북한 관계에서의 조선족 역할
Ⅳ. 나가는 글
※ 참고 문헌 ※
< 표목차 >
표1: 남북인적교류현황 인원(명)
표2: 북한에 대한 관심도
표3: 북한의 변화정도
표4: 김정일체제에 대한 북한 주민들의 지지도
표5: 북한의 장래
Ⅰ. 들어가는 글
오늘의 재중동포(이하:조선족)는 토착 조선족과 과경(跨境)조선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중 토착 조선족 후예로는 료양 고씨와 박씨 후손인데 이들은 이미 한족(漢族) 혹은 만족(滿族)에 동화되어 살고 있기는 했지만, 1982년 인구조사 때 떳떳이 호적부에 다시 조선족으로 개적(改籍)하였다. 료양 고씨는 고구려인의 후예로 2002년 현재 료녕성 대안현, 고려방진, 철령현 대포가강자촌과 소범하에 1,892명이 살고 있으며, 밖씨 성을 가진 조선족은 명청시기에 이주해온 조선인 후예로 1,470명이 거주하고 있다. 고영일,『우리민족력사』(북경:민족출판사, 2003), pp. 10-12.
그리고 과경(跨境)조선족의 유래는 19세기후반 1895년 청나라에서 장백산(백두산) 주변지역에 대한 을 해제하면서부터 이민의 합법성을 띠게 되었으며, 이후 일본의 조선침략이 강화되면서 본격화되었다. 그러다 1945년 일제패망과 함께 이주는 정지되었으며,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면서 완전 중지되었다. 조선인들은 일제초기에는 압제를 피해, 또는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그리고 경제적 이유로 국경을 넘었고, 1930년대는 일제의 강제이주정책으로 집단이주를 하기도 했다. 최우길,“중국조선족의 정체성 변화, 위치와 역할,”「새천년 한국인의 정체성; 제11회 한국학 국제학술회의」(한국정신문화연구원, 2000), p. 32.
이들은 조국의 독립과 연계하여 중국의 항일전쟁에 참여하였고, 또한 중국 내 인민해방전쟁에 1945년 8.15일 이후 중국에 거주하던 조선족 인구의 반 이상이 한반도로 귀국하고 남은 조선족들은 중국 내 인민해방전선에 참여하여 15인당 한 사람의 비례로 중국공산당에 참군, 중화인민공화국 창건을 위해 싸웠다.
고영일, 위의 책, p. 122.
까지 동참함으로써 중국정부의 두터운 신임을 받으면서 점차 중국소수민족의 하나로서의 지위를 확보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이들은 중국을 ‘이국’으로부터 점차 자기의 삶의 고장, ‘조국’의 하나로 여기게 되었으며 자신들의 운명과 중국의 운명을 함께 생각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3주년이 되던 1952년 9월3일 연변조선족자치구 면적 42,700㎢, 인구 2,195,000명(1998년 기준)이다. 주도(州都)는 옌지시[延吉市]이다. 조선 말기부터 조선인 이 이주하여 개척한 곳으로 이전에는 북간도라고 불렀다. 1952년 9월 3일에 자치구가 설립되고, 1955년 12월 에 자치주로 승격되었다. 옌지[延吉]·투먼[圖們]·둔화[敦化]·허룽[和龍]·룽징[龍井]·훈춘[琿春]의 6개 시와 왕칭 [汪淸]·안투[安圖] 2개현으로 구성되어 있다. 11개 민족이 거주하고 있는데 그 중 조선족이 41%를 차지하며, 나머지는 한족(漢族)·만주족(滿州族)·후이족[回族]의 순이다. 리창역, 『중국공산당 연변조선족자치주조직사』(연 변: 인민출판사, 1991), p. 3에서 1998년을 기준으로 수정 삽입 함.
(후에 자치주로 개칭)인민정부의 창립을 선포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중국에 거주하는 조선인은 조선족(朝鮮族)으로 중국의 새 성원으로써의 그들의 삶을 시작한 역사를 안고 있다.
이 글은 조선족이 스스로를 “중국의 조선족”으로 인식함을 전제로 하고 Ⅱ장에서는 중국의 소수민족의 정책을 통해 조선족 약사와 조선자치주의 성립과정을 기술하고, 조선족에게 주어지는 새로운 환경 앞에서 그들의 정체성에 관한 고민과 새로운 모색을 짚어볼 것이다. Ⅲ장에서는 1992년 한중 수교 이후 한국과의 다면적 교류는 이들의 삶의 방식의 변화와 함께 남북한을 바라보는 인식도 변했다. 그 인식변화의 과정을 살펴보고 한반도 통일에 있어 이들의 역할을 조망해보고자 한다. 아울러 한국 또한 조선족에 대한 새로운 인식으로 국가적 차원에서 재접근해야함을 피력할 것이다.
Ⅱ. 연변조선족 자치주의 전략적 위치와 역할(중요성)
중국조선족 사회가 격변기에 처해 있다는 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이는 중국사회의 개혁개방 20년, 그리고 한중 수교 10년의 역사와 그 맥을 같이한다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들은 이제 한중 사이에서 자신들에 대한 위치를 새롭게 인식해가고 있다. 더욱이 이들의 존재는 한반도 통일과 밀접히 관련지을 수 있다는 점에서 더욱 중요한 역할의 잠재성을 내포하고 있다 할 것이다. 그러면 우선 이들이 ‘중국의 조선족’에 위치해 있음으로 남북한과 조선족의 관계에 앞서 중국의 소수민족으로써의 그 존재적 위치를 먼저 확인해야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