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학개론] 삶에 대한 성찰 - 나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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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교육학개론] 삶에 대한 성찰 - 나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삶에대한성찰(그 이념과 목적과 방법등에 대하여)
부제: 나도 그런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처음부터는 아니었다. 처음에 내 꿈은 과거의 흔적들을 조사해서 과거 속에 파묻혔던 역사의 조각조각을 하나씩 끼워 맞춰 완성시키는 역사학자가 꿈이었다. 내 꿈이 바뀔 거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고 의심의 여지도 없었다. 그러나 ‘사람의 앞일은 장담 못 한다’는 옛말하나 틀린 것이 없었다. 내 꿈이 결정적으로 바뀐 일은 고2때 일이었다. 우리학교는 특수학급이 있었는데 특수학급은 1층이었고 우리교실이 2층이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우리보다 한 학년어린 특수학급학생이 우리 층으로 올라왔다. 그 학생과 같은 중학교를 나온 남자아이들이 반장난식으로 그 아이를 놀리며 인격적으로 모독을 했었다. 그러자 그 학생은 빔프로젝트의 끈을 자기스스로의 목에 감아 자학을 하는 일이 벌어져서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그 순간 나는 물론이고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조차 말릴 생각조차 못 했다.결국엔 반장이 선생님을 모셔와서 일이 진정된 적이 있었다. 아마 갑작스러운 일이라서 놀란 것도 있겠지만 나를 포함한 그 누구도 선뜻 나서지 못했다. 처음에는 놀라서 그런 거겠지라는 생각으로 넘어갔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내 친구들이 저랬어도 나는 가만히 있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에 답은 그 학생이 장애학생이었기 때문이라는 답이 나왔다. 나뿐만 아니라 다른 아이들도 선뜻 나서지 못하는 걸보면서 똑같은 사람이고 똑같은 학생이며 똑같은 친군데 우리의 불찰로 한 생명이 큰일 날 뻔했다는 죄책감이 들었다. 이 일이 있기전까지만하더라도 시각장애인들이 거리에서 마주치면 행여나 말이라도 걸까 피하기 일쑤였고 지하철이나 횡단보도에서 cane을 가지고 생활하시는 분들을 보면서 도와주기는커녕 와 대단하다‘장애인들도 생활을 하는구나’라고 속으로 생각하면서 다시 한 번 뒤돌아보기 일쑤였다. 시각장애인뿐만아니라 청각장애인들의 수화라는 문화도 이해해 줄줄 몰랐고 생소한 개념으로 우리의 문화와는 이질적이라는 생각으로 다른 문화처럼 여겨버렸다. 어쩌면 장애에 대해 학교에서 배워온 교육처럼 항상 도와주고 배려해 주어야하며 이해해야한다는 이론적인 개념은 충분하다는 생각만으로 장애인들을 전부 이해하고 있다는 자만심 아닌 자만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그러나 이 일로인해 크게 무너졌다. 정작 도와주지 못하고 순간 당황하며 뒷걸음질 치는 내 모습을 보면서 내가 내 자신에게 창피했다. 그래서 이 일이 있고난 후부터 항상 내 모든 사람을 동등하게보고 동등하게 대해주자였다. 물론 처음에는 마음만 먹었다고 해서 행동이 바로 변하지는 않았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색안경이 있었고 장애를 가진 학생들과 접촉하기 싫어했다. 길을 가더라도 신기해서 다시 한 번 뒤돌아 본적도 많았다. 그러나 점점 더 나이를 먹고 사회 속에서 소외받는 계층들에 대해서 점점 더 주목하고 자활을 다니면서 오히려 그런 맘이 서서히 사라졌다. 고등학교 3학년 때 항상 한 달에 2번씩 예가원이라는 곳에 자원봉사활동을 갔었다. 그곳에는 몸이 불편하신 노인 분들도 계셨고 버려진 아이들도 있었고 장애를 가지신분들도 많았다. 처음에는 유아들을 많이 보았는데 자폐를 가지고 있는 아이들도 있었고 몸이 불편한 아이들도 있었다. 그 중에 성빈이라는 발가락이 서로서로 붙어서 걷지 못하는 아이가있었는데 그 아이는 유독 사람들한테 안기는 걸 좋아했다. 나는 처음에는 아이임에도 불구하고 무서운 것이 강해서 그 아이가 안길려고하면 뒤로 몸을 빼거나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겨 다녔다. 그런데 유독 그 아이를 친자식처럼 보듬어주고 아껴주는 선생님이 계셨다. 그리고 그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을 지금도 잊을수가없다. ‘성빈이는 부모가 버려서 시에서 보육원으로 보낸 아이인데 사랑을 못 받아서 자꾸 누구한테 안겨서 사랑을 확인 받고 싶어 하는 거야. 근데 나의 손길 한번이 이 아이에게는 사랑을 확인시켜줄 수 있고 이아이가 밤에 잘 때 버려지는 기억 없이 편히 잘 수 있어.이 손길 한번이.......‘ 이 말을 듣는 순간 머리가 띵해졌다. 정말 부끄러웠다. 단순히 육체적으로 나와 조금 다른 것뿐이었는데 내가 어린아이 맘에 상처를 낼 수도 있었을 행동을 한 것 같아서 죄책감이 들었다. 그리고 처음이었다.’닮고 싶다‘라는 생각이 드는 사람이. 그 뒤로도 항상 봉사활동을 할 때는 그 반에 배정되어 갔는데 마음에 벽을 허물고 대하다보니 어느 순간부터는 장애가 보이지 않았다. 그 아이도 일반아이들처럼 똑같이 보이고 오히려 더 마음이 쓰이고 손이 먼저 그 아이에게 가게 되면서 색안경이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그리고 장애에 대한 색안경이 없어지게 된 계기는 위에 말한 것처럼 김지원선생님의 말씀하나하나 행동하나하나가 나의 색안경을 벗겨 주셨다. 유아반에 계속 있다가 언제부턴가 몸이 불편하신 분들께 직접급식을 배달하기도하고 시각장애가 있으신 분들께는 점심시간에 배식 받는걸 도와드리고 점심 후에 있는 예배시간에 피아노반주도 도와드렸다. 겨울에 합동연주를 할 때 약시가 있으신 분께서 하루에 30분씩 드럼도 가르쳐주시고 밥도 같이 먹고 학교생활얘기도 들려드리면서 서로 교감을 했는데 마지막에 그 분이 고3이라 수능보기전에 초콜릿을 주시면서 시험잘보라고 응원해주시던 모습을 잊을 수 없다. 처음에는 고3이라 부모님께서 시간을 많이빼앗길까봐 걱정도 많이 하셨지만 나의 주말시간을 조금줄이는대신 봉사활동을 하기로 약속을 했고 봉사하고싶은마음을 이해해주셔서 수능이 끝나고는 같이 봉사활동을 하며 어머니는 주방에서 음식만드는걸 도와주시고 나는 말동무가 되어드리는걸 자처했다. 그러한 봉사활동을 하면서 나도 내 자신에 대해서 한 번 더 되돌아보게 되었고 사소한 것 하나에도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활동들을 통해서 나란 작은 존재가 그 어떤 사람에게는 큰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에 많은 보람을 느꼈고 내 인생을 조금 더 보람차게 살 수 있는 방법은 역사학자보다 한사람을 하나의 개체로 완성시켜서 사회에서 함께 어우러져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에서 더 보람참을 느낀다는 깨닫고 교사로 마음이 기울기 시작했다. 그리고 일반교과를 가르치는 교사보다 나의 손을 더 많이 필 요로하고 내가 더 큰 도움이 될 수 있는 특수교육교사로 점차 구체화하게 되었다. 특수교육교사로 꿈을 정하면서 자활을 할수록 장애학생을 대하는 일은 어머니가 아이를 키우는 기쁨 같다는 걸 느꼈다. 아직 아이를 낳아본적은 없지만 대학입시에 맞추어서 가르치는 교사보단 정말 사회에서 꼭 필요한 지식만을 가르치면서 자칫하면 낙오될 수 있는 사람들을 내손으로 받쳐주어 사회로 밀어올려주는게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애초부터 꿈을 정하는데 마찰이 없을 수가 없었다. 부모님께 처음 말씀드렸을 때 반대가 매우 심했었다. 언니도 교사라서 부모님께서는 나도 교육자의 길을 걷길 원하셔서 교육자 쪽으로 꿈이 바뀐 건 내심 좋아하셨지만 아무래도 특수교사다보니 아직까지 사회적으로 인식이 개선되지 않았을뿐더러 학교나 사회에서 받는 대우가 일반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와 다르고 여자로서 하기가 더 힘들꺼라고 꿈을 바꾸기를 원하셨다. 나도 거기까지에 대해서 생각을 못해봤기에 원서를 쓸 때 매우 망설였다. 그러나 힘듦이 없으면 보람이 없을꺼고 그리고 무엇보다 나란 사람이 누군가한테 정말 큰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그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리고 김지원선생님의 말씀이 꿈을 정하는데 가장 역할이 컸다. 이런 내 모습을 보시고 부모님께서도 내 의견을 존중해 주셨고 결국 사대에 입학하게 되었다. 대학에 들어와서 장애학생들을 교육하는 법을 배우면서 수화도 배워서 직접 체험하면서 소통을 하고 점자를 찍으면서 엘리베이터에 있는 점자하나 그냥 지나치지 못하게 되었고 우리와 다른 문화에 대해서 신기해하기도 하고 그들만의 문화를 존중해주고 싶다는 생각이들었다. 대학에 들어와서 고등학교 때와는 또 다른 장애학생들을 곰두리라는 곳에서 자활하는 것이나 평택캠프같은 고등학교 때보다 더 많이 생활 속에서 장애학생들을 겪으면서 장애에 대한 많은 편견들이 사라졌다. 그러나 지금 와서 다시 돌이켰을 때 과연 내가 지금 적성에 맞게 과를 잘 선택했는지 예비특수교사로써 잘하고 있는지 앞으로 어떻게 더 좋은 쪽으로 발전할 수 있을까등 여러 가지 내 자신에 대해 되돌아보게 되고 미래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지금 되돌이켜보면 열 번의 역지사지의 마음을 가져야지 이해하고 배려해야지 라는 생각보단 한 번의 그 상황에서 합리화를 하려하고 이기적인 마음을 먹었던 일이 더 많이 생각나고 그래서 더 부끄럽다. 하지만 대학이라는 터닝 포인트를 겪으면서 내 자신이 그 전보다 많이 성숙했다고 생각한다. 비록 아직도 온전히 100% 모든 걸 다 이해하고 배려한다고 자부할 수는 없다. 그러나 앞으로 이 학교에서 이 과에서 나와는 다르지만 꿈만은 같은 사람들이 함께 생활해나가면서 자활도 많이 하고 방학 때에는 장애캠프같은곳에 가서 직접 체험해보고 조금 더 이해심을 많이 채워와서 심리치료쪽으로 집중적으로 공부할 계획이다. 그리고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다른 선진국의 장애교육에 대해서 좀 더 알아보고 싶은 마음도 크기 때문에 연수도 받을 계획이다. 4년 뒤 한사람이 사회로 나갈 수 있게 발판이 될 수 있는 사람이 꼭 되고 싶다. 그리고 내가 김지원선생님을 보고 느낀 것처럼 누군가 나의 모습을 보고 ‘나도 저 사람처럼 되야지’라는 생각이 들 수 있도록, 그래서 누군가에게 꿈을 줄 수 있도록 하기위해 조금 더 성숙하려한다. 그래서 장애를 가진 사람이‘조화’를 최고로 삼는 이 사회 속에서 낙오되어 불행해지는 걸 막고 싶다. 장애는 몸이 조금 불편한것일 뿐 불행한 것은 아니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