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랑(永郞) 김윤식 - 생애와 활동 & 문학사적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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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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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영랑(永郞) 김윤식
1. 생애와 활동
영랑의 본명은 김윤식이다. 영랑은 전남 강진군 강진은 정약용, 김정희, 초의 등의 이름 때문에 널리 알려진 곳이며, 그들이 끼친 영향은 꽤 깊게 남아 있어 보인다. 김영랑, 박용철, 김현구를 ‘강진시파’라 부르기도 한다. 강진시파의 원공간인 강진은, 신석정에 의하면, “해양성 기후라서 사철 온난하고 비가 유달리 많은 것이 특징이다. 봄날에는 강진만 앞바다의 크고 작은 섬들이 마치 물오리떼처럼 은빛으로 남실거리며, 좀처럼 영하로 온도가 내려가는 법이 없어, 난대식물들이 무성히 자라고, 대숲과 동백이 우거진 곳이다.” 라고 하였다. 바다, 섬, 비, 대, 동백이 강진의 시적 공간이 되고 이러한 자연환경에 둘러싸인 영랑은 윤선도의 뒤를 이어, 충청도의 한용운, 경상도의 이상화, 평안도의 김소월에 맞설 만한 전라도의 시인으로 성장한다.
김현, 한국문학대계 7 김영랑 박용철외, 지식산업사, 1981,p.167
에서 500호 지주 김종호의 5남 3녀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1909년 봄부터 영랑은 서당에 다니기 시작하였고, 1911년에는 강진 보통학교에 입학하여 1915년에 졸업하였다. 그의 나이 열세 살 때인 1916년에 영랑은 부친의 뜻에 따라 김은하와 결혼하였으나 다음 해에 사별하고 만다. 죽은 아내에 대한 그리움은 뒷날 다음 「쓸쓸한 뫼아페」를 짓게 한다.
영랑은 1917년 3월에는 휘문의숙에 진학하게 된다. 1919년 봄 휘문의숙 3학년에 재학 중이던 그는 31운동사건에 가담한 죄로 경찰에 체포, 구속되었다가 석방된다. 곧 고향 강진 땅으로 내려 간 영랑은 그곳에서도 독립 만세운동을 모의하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6개월간 옥고를 치렀고 결국 휘문의숙을 중퇴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그 해 10월 하순경에 금강산 장안사를 중심으로 한 내금강 일대와 고성에 있는 영랑호를 여행하고 서울로 돌아온다.
이듬해인 1920년 9월 영랑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일본 동경에 있는 청산학원(이오야마 학원) 3학년에 편입학 하여 뒷날 영랑의 문학적 동반자이자 최대의 후원자가 된 박용철을 만나게 된다. 박용철과 김영랑은 함께 하숙하면서 아주 가깝고 친한 사이가 되었다. 이 시기에 영랑은 자신의 아호를 영랑(永郞)으로 정하였다.
1921년 7월하기 휴가를 맞아 잠시 귀국한 영랑은 음악을 전공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으나 완고한 아버지에게 거절당하고 만다. 일본으로 돌아간 영랑은 9월 이후 학교 도서관에 묻혀서 문학 서적을 읽는데 몰두하게 된다. 영랑의 동경 유학생활은 1923년 관동대지진의 여파로 중단되고 이듬해 귀국한다. 고향의 생가로 돌아온 영랑은 1924년 훗날 최고의 무용가로 이름을 날리게 되는 최승희와 교제하였지만 결혼에는 실패하고, 1년 뒤 루시아 여고에 근무하고 있던 안귀련과 재혼하였다.
영랑이 28세 때인 1930녀 3월, 박용철의 주도로 우리 현대시문학사에 획기적인 순수 시동인지《시문학》이 발간되었다. 여기에는 영랑과 정지용, 이하윤 등이 참여하였는데 영랑의 경우,「동백닙에 빛나는 마음」 등 30여 편의 시를 발표함으로써 시문학파의 대표적 시인으로 떠오른다.
1931년 박용철이 발간한 《문예월간》에는, 《시문학》발간 때의 ‘순수와 양심을 저버리고 해외 문학파 이하윤 등과 타협한’ 박용철과의 불화로 단 한 편의 시도 발표하지 않았지만 1934년에는 박용철 주간의 《문학》지에 「모란이 피기까지는」과 「사행소곡(四行小曲)」 등을 발표하였다. 1938년 절친한 벗 박용철이 죽음을 맞았고 영랑은 『박용철 전집』을 발간하였다. 그리고 1939년부터 두 해 동안 15편의 시작품을 《여성》,《월광》,《문장》 등에 발표하였다. 특히《문장》의 경우 영랑의 대표작인「오월」,「毒을 차고」,「춘향」등이 발표되었다.
영랑은 1940년 9월「춘향」을 마지막으로 하여 1946년까지 작품을 발표하지 않았는데 이는 문학적으로 침묵함으로써 일제에 저항하고자 한 모습으로 해석될 수 있다. 영랑은 일제 말 군국파시즘이 강요하였던 신사참배나 창씨개명을 끝까지 거부하였고, 한복만 즐겨 입는 등 저항적인 태도를 견지하였다.
1945년 43세에 해방을 맞으면서 그는 대한독립촉성회 강진단장을 지내는가 하면, 1948년 510 선거 때는 초대 민의원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고 가산을 정리하여 서울로 이사를 한다. 그 해 10월 중순에 여순반란사건의 현장을 답사하고 그 사건의 만행을「새벽의 처형장」을 통해 고발하였으며, 1949년 이승만 대통령의 추천으로 공보처 출판국장으로 6개월간 일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50년 625가 나던 해인 49세 때 미처 피난을 못간 채 서울에 은신해 있다가 포탄의 파견을 복부에 맞고 9월 29일에 영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