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어학 “소설『테스』의 현재성” 白樂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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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소설『테스』의 현재성” (白樂晴)
1. 『테스』에 관한 몇 가지 해석
① 토마스 하디(Thomas Hardy)의 소설 『더버빌가(家)의 테스』(Tess of the dUrbervilles)는 1891년에 발간된 이래, 비평가들의 온갖 찬ㆍ반 시비에도 불구하고 처음부터 대중적 인기를 착실히 누려왔다. 오늘날도 『테스』는 19세기 영국 소설 가운데 가장 널리 읽히는 작품의 하나이고, 하디가 또한 위대한 소설가라는 점에 대해서는 이제 상당히 폭넓은 합의가 이루어졌지만 여기에도 강력한 반론이 남아있으며 다른 하디의 소설들에 대한 구체적인 해석과 평가에 이르면 각양각색의 이야기가 쏟아져 나온다. 이 글에서는 그렇듯 다양한 논의의 극히 일부나마 검토하는 데서 출발하여 지금 이곳의 독자들에게 이 작품이 무엇을 말해줄 수 있는지를 밝혀 보고자 한다.
② 『테스』가 결국은 하나의 통속소설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판은 많이 나왔었던 사실이다. 그러나 ‘통속’이라는 비난보다 하디 자신에게 더욱 심각했던 문제는 소설이 비도덕적이요 반종교적이라는 비난이었다. 이것은 당시 영국 사회의 특수한 풍토를 떠나서는 이해하기 힘들다. 언론 출판의 자유에 대한 법적 보장은 일찍부터 쟁취한 영국이었지만 출판물에서 성 문제나 교리 문제를 다루는 일은 사회적으로 금기가 되어있었다. 『테스』의 저자가 불온분자로 몰린 까닭도 바로 이것이었다. 테스 자신은 한번 정조를 잃더니 결국 살인범이 되고 사형까지 당하게 되므로 대가를 지불한 것치고는 더 바랄 나위가 없다면 없지만, 문제는 이것이 부당한 운명이라는 작가의 태도였다. 그녀 자신도 나중에는 자기가 잘못한 게 없다고 나올뿐더러 저자가 그녀의 이러한 태도를 비난하려는 의도가 도무지 안 보이는 것이다.
시대가 달라지면서 이러한 윤리적 비난은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그렇다고 위대한 소설가로서의 하디에 대한 충분한 평가가 쉽사리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1940년대까지도 하디 소설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라는 것이 ‘전통적’ 바탕을 지닌 작가(데이비드슨-1940), 19세기의 소설문학보다 엘리자베스시대의 희곡에 가깝다(쎄실-1943) 등의 입장이다. 이러한 입장은 하디를 현대인의 문제를 결코 정면으로 다룰 줄 모르는 시골뜨기로 일단 설정해놓고서 부담 없이 찬사를 베푸는 우월감 같은 것을 느끼게 한다.
하디를 20세기 소설가들과 동렬에 서는 작가로 새로이 평가한 연구자로는 게라드 교수가 있다. 엄밀히 말해 콘래드 등과 동렬이라기보다 19세기의 다분히 대중적인 소설에서 20세기의 좀 더 진지하고 더러는 상징적인 소설로 넘어오는 과도기의 인물로 파악하는 것이 게라드의 입장이다. 하디 소설의 결함으로 지적했던 많은 요소들이 사실은 그의 ‘현대적’ 비전과 이를 표현하기 위한 ‘반사실주의적’ 기법에 다름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리얼리즘’의 문제를 너무 간단히 처리해버리는 게라드의 모더니스트적 입장은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기도 하다. 게라드는 “그〔하디〕는 ‘낭만적’이라는 낱말이 나쁜 뜻으로 아니고도 이따금 적용될 수 있는 극히 드문 반리얼리스트들 가운데 하나이다.”라고 하지만 이런 식의 ‘낭만적 리얼리즘’이야말로 발자끄나 디킨즈에 그대로 맞는 묘사이며 그것은 피상적 사실주의ㆍ자연주의와 구별되는 진정한 ‘리얼리즘’으로 불러 마땅한 것이 아닐까?
사물의 겉모양이나 베껴내는 ‘리얼리즘’이 예술의 본질과 거리가 멀다는 것은 자신도 확인한 바 있지만, 그는 또한 자기 소설의 무대를 이루는 ‘워쎅스’ 지방의 지형ㆍ풍속ㆍ물정의 세밀한 구석까지도 정확하게 그려내고자 무진장 애썼던 작가이다. 더구나 ‘리얼리즘’이라는 낱말 자체도 하디가 항상 부정적으로 쓴 것은 아니었다. 게라드의 하디관에서는 ‘영원한’ 농촌세계의 작가라는 종래의 해석이 중첩되었을 뿐, 생동하는 당대 역사의 절실한 문제와 씨름했던 리얼리스트의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게 되어 있다. 이러한 경향은 오늘날까지도 하디비평의 지배적인 흐름이 아닐까 생각된다.
③ 대부분의 하디연구가가 당대 역사의 구체적인 현실과의 연관을 무시하고 있는 데 반해, 아놀드 케틀『테스』론(1953)은 이 소설의 주제가 다름아닌 “영국 농민층의 파괴”라고 단정 짓고 출발한다. 이 해석에 따르면 시골처녀 테스가 처음에는 알렉 더버빌에게 그리고 다음에는 어쩌면 그보다 더욱 잔인하게 에인절 클레어에게 희생당하는 것은 당시 영국 농민층의 역사적 운명을 반영한 것이 된다.『테스』에서 작가가 테스의 비극적 결말을 가져오기 위해 지나치게 많은 우연의 일치를 동원하고 있다는 사실은 케틀 자신도 작품의 결함으로 인정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디가 다루고 있는 엄청난 현실 앞에서 작가의 사상적 한계가 드러난 것뿐이며, 더구나 테스의 이야기를 사실주의적인 심리연구로 보지 않고, 하나의 ‘도덕적 우화’로 읽을 때 많은 문제가 저절로 풀린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단순히 당대 사회와 역사에 대한 정의로운 발언으로 만족하지 않고 진정한 리얼리즘의 예술로 승화된 발언을 요구하는 입장에서라면,『테스』가 비사실주의적인 도덕적 우화라는 해석에는 문제점이 있다고 보아야겠다. 얼핏 보아도 하디의 소설은 사실주의에 어긋난다고 느껴지는 요소에 못지않게(적어도 분량을 따진다면 오히려 그보다 훨씬 많이)충실한 자연주의적 묘사를 담고 있는데, 이 모든 것이 ‘도덕적 우화’를 위한 살붙임에 불과하다면 예술적 경제의 원칙에 비춰서도 손실이 큰 셈이다. 또한 레이먼드 윌리엄즈가 강조하듯이 ‘농민’(peasant)이라는 말 자체가 도무지 적절치 못하다. 영국에서는 이 말의 고전적 의미에 값하는 중농이하 소농ㆍ빈농ㆍ소작농 등의 개념이 무의미해진지 오래였다. 영국사에서 하나의 중요한 사회계층으로서의 자유농민층의 몰락은 하디 시절보다 훨씬 앞선 일이었다. 실제로 테스 아버지의 직업은 행상이다. 자유농민의 후예지만 계급의 분화과정에서 하락하여 중간계층(상인ㆍ수공업자)에 머물다가 특별한 행운이 따르지 않는 한 농업노동자가 아니면 도시의 빈민 또는 노동자로 전락하기 십상인 위치에 있는 것이다.
정확한 사실인식과 일치하는 레이먼드 윌리엄즈, 메린 윌리엄즈 등의 작품해석이 막연히 ‘농민층의 파괴’를 말하는 케틀보다 소설『테스』에서 한층 풍부한 의미를 읽어내고 있다. 레이먼드 윌리엄즈가 “교육과 계급간의 제관계의 전반적 구조와 그 위기”에 휘말린 인간들의 비극이 그의 핵심적 주제였다고 보는 것이 설득력이 있는 것 같다. 이런 각도에서 접근할 때 하디의 수많은 주인공들이 사실은 동일한 일대 위기에 처한 인간들임을 알아볼 수 있게 되며 동시에 그들 하나하나의 신분ㆍ교육ㆍ재산의 정도와 주어진 상황을 세심하게 명시하려는 작가의 노력도 그만큼 더 보람 있는 일이 된다. 리얼리스트 하디의 노력은 이 다양한 인물들이 모두 농촌뿐만 아니라 영국의 교양계층과 사회 전체를 망라하는 역사적 위기의 표현임을 전제할 때에만 그 예술적 타당성을 제대로 인정할 수 있는 것이다.
2. 영국의 농촌소설과 한국 독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