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와 예술 한복 한복 역사 한복 우수성 한복 소개 한복 입는법 한복 만드는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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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미와 예술 한복 한복 역사 한복 우수성 한복 소개 한복 입는법 한복 만드는 방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미와 예술
- 한 복 -
-서론
옷은 자아의 연장이며, 남들에게 자신을 내보이는 첫 번째 표출 수단입니다. 그러므로 한복은 우리 민족을 대표하고 우리가 한민족이라는 것을 느끼게 해주고 다른 민족과 구별이 되게 하는 한글과 함께 가장 중요한 민족의 상징이 되어왔습니다. 한복이 삼국시대부터 현재까지 이어져 내려오면서 그 모습이 많이 바뀌어 왔는데 기술의 발달과 삶의 양식이 변해왔기에 그랬을 것입니다. 그리고 현재에는 한복을 평상복으로 입지는 않는데, 이런 시점에서 한복이 가지는 의미는 더욱 중요하다. 우리 조 에서는 이번 주제인 한복에 대한 가치와 역사를 비롯하여 전통한복의 계승 및 발전된 예와 현재 한복의 전망에 대하여 조사해 보았습니다.
-본론
먼저 한복의 역사에 대해 설명 하겠습니다.
고조선시대에 이미 초의생활(草衣生活)에서 벗어나 칡과 삼으로 짠 옷감을 사용하고, 전잠(田蠶)과 직조의 기예가 늘어감에 따라 의류문화에 진전을 보여주었습니다. 그 후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시대에는 옛 사기(史記)나 고분벽화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대체로 유() ·고(袴)와 상(裳) ·포(袍)를 중심으로 한 복장이었으며, 여기에 관모(冠帽) ·대(帶) ·화(靴) 또는 이(履)가 첨부되었습니다. 유는 저고리로서 상체의 옷이고, 고는 바지, 상은 치마로서 하체의 옷이며, 여기에 머리에는 관모를 쓰고, 허리에는 대를 띠며, 발에는 화 또는 이를 신어 포피(包被)로서의 의복의 형태를 갖추는 동시에, 그 위에 두루마기로서의 포를 더함으로써 한대성(寒帶性) 의복 곧 북방 호복(胡服) 계통의 의복을 나타냅니다. 이에 있어 유(저고리)는 곧은 깃에 앞을 왼쪽으로 여몄으며[左], 소매가 좁고[筒袖],길이는 엉덩이까지 내려오는 것으로, 오늘날의 승복 ‘동방’과 비슷한 것이었으며, 허리에 띠를 둘렀는데, 특히 깃 ·도련 ·소맷부리에는 빛깔이 다른 천으로 선을 둘렀습니다.
이후 중국과 교류가 잦아지면서 중국복식의 영향을 받아 좌임이 우임(右)으로 변하고 소매도 넓어지는데[寬袖], 선은 오늘날에도 회장 ·끝동 등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 저고리를 신라에서는 위해(尉解)라고 일컬었는데, 오늘날 저고리를 우티 ·우치라고 하는 방언(方言)도 이에서 연유된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저고리라는 표현은 조선 세종(世宗) 2년(1420) 원경왕후(元敬王后) 선전의(選奠儀)에 ‘赤古里’라는 말로 처음 나오게 됩니다. 고(바지)는 용도에 따라 폭과 길이에 변화가 있었는데, 양복바지와 같이 폭이 좁은 궁고(窮袴:細袴)와 지금의 한복 바지와 같은 대구고(大口袴:또는 寬袴)가 있었고, 오늘날의 잠방이와 같은 가랑이가 짧은 곤()이 있었습니다. 궁고는 곤과 더불어 민층의 하의(下衣)였고, 대구고는 상류층의 하의였는데, 발목을 대님으로 묶기도 하였습니다. 이 바지를 신라에서는 가반(柯半) 또는 가배(柯背)라 하였는데, 지금 우리말의 고의 ·고쟁이도 이에서 어원을 찾을 수 있으며, 바지라는 표현은 조선시대에 들어와 정인지(鄭麟趾)가 ‘把持’라 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하나, 이 호칭은 이미 널리 사용되었으리라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당시는 여자도 바지를 입는 것이 기본 복제(服制)였기 때문이죠.
상(치마)은 여자 전용의 하의로서, 고와 상을 혼용하였습니다. 형태는 일반적으로 길이가 길고 폭이 넓어 땅에 끌릴 정도였으며, 허리 부분부터 치맛자락 끝까지 잔주름이 잡혔고, 다시 치맛자락 끝에 일종의 장식연(裝飾緣), 곧 선을 둘러 조선시대의 스란치마를 연상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상을 치마로 표현한 첫 기록은 앞에서 든 원경왕후 선전의에 ‘赤古里’와 함께 나오는 ‘赤’로서, 한글로는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빈(嬪) 혜경궁 홍씨(惠慶宮 洪氏)의 《한중만록(閑中慢錄)》에 처음으로 등장합니다. 포(두루마기)는 표의(表衣)를 뜻하는 것으로서, 당시에는 유와 고 위에 착용하여 양복의 외투와 형상이 비슷하였는데, 오늘날의 두루마기에서와 같이 직령(直領) ·교임(交) ·중거형(重型)의 것이 아니고 직령 ·교임 ·직수형(直垂型)의 것이었으며, 여기에 띠를 둘렀습니다. 이 포를 당시에는 왕공(王公) 이하 평민에 이르기까지 남녀가 모두 보편적으로 착용하였습니다. 포를 가지고 두루마기라 한 것은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옷의 폭을 쭉 돌아가면서 다 막았다는 데서 나온 순수한 우리말 표현이며, 주의(周衣)라는 명칭은 이를 거꾸로 한자화(漢字化)한 것입니다.
이러한 한복의 기본형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큰 변화가 없습니다. 다만 관복(官服)에서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무렵(眞德女王 2년) 중국 당(唐)나라의 제도를 받아들여 습용함으로써 고려 ·조선시대까지 중국의 제도를 준용하였습니다.
중국과 한국은 정치 ·문화 교류를 통하여 양국의 복식도 서로 영향을 끼쳤는데, 신라의 경우는 반비(半臂) ·배당(褙)을 비롯하여 여자 포제(袍制)로서의 활수의(闊袖衣) ·색사대(色絲帶)가 그것입니다. 고려 때에는 제25대 충렬왕(忠烈王) 이후 원(元)나라의 부용국(附庸國)이 되면서 복식 풍습도 몽골풍(蒙古風)을 많이 따랐는데, 질적으로 큰 변화를 가져온 것은 아니었으며, 제31대 공민왕(恭愍王) 때 원나라가 쇠망하고 한족(漢族)의 명(明)나라가 다시 중국을 지배하게 되자 몽골풍은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저고리 길이가 짧아지고 소매가 좁아진 것은 몽골 복식의 영향이며, 이로 말미암아 띠가 없어지고 대신 고름을 달게 되었습니다. 또 여자 화관(花冠)이 당나라에서 전해 온 것이라고 하면, 족두리는 몽골인의 고고리(古古里:姑姑, 顧姑)였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임진(壬辰) ·병자(丙子)의 두 국란을 겪으면서 우리 민족의 자각심이 일기 시작하여 민족 복식을 형성하게 됩니다. 이에서 두드러진 것은 남자의 포제와 입제(笠制)이며, 여자의 예복과 친의류(衣類:속옷류)입니다. 남자의 포제는 포의 기본형에서 고려의 백저포(白紵袍)를 거쳐 직령(直領)→ 도포(道袍) → 창의(衣)에서 조선 말기의 주의(周衣)로 발전하며, 입제는 평량자(平梁子) → 초립(草笠) ·흑립(黑笠)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여자의 예복은 중국의 활수의 ·색사대에 속한 적의(翟衣) ·대삼(大衫) 등이 원삼 ·활옷 ·당의 등으로 국속화(國俗化)되었고, 친의류는 단속곳 ·바지 또는 고쟁이 ·속속곳 ·다리속곳 ·너른바지 등으로 다양해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조선 말 개화기에는 양복 ·양장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한복에 대한 인식이 희박해 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