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마누엘 칸트 - 생애와 이론개관 - 교과서에 적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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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임마누엘 칸트 - 생애와 이론개관 - 교과서에 적용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Immanuel Kant
(1724~1804)
Ⅰ. 칸트의 이론개관
1. 칸트의 생애
칸트의 건조한 글쓰기 방식은 당대의 대 철학자였던 Christian Wolff의 영향이었다고 한다. 볼프는 글쓰기에 있어 대중성이 과학에 필요한 엄밀한 사고에 악영향을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칸트 자신도 스스로를 엄밀성을 추구하는 과학적 일꾼 (scientific laborer)이지, 보다 많은 대중에게 호소할 수 있는 문학적 수사가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표현의 난해함은 과거 철학으로부터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을 시도했던 칸트 비판 철학 자체에서도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칸트는 1724년 4월 22일, 동 프러시아 퀘니히스베르그 (Koenigsberg)에서 태어났다. 이 당시 퀘니히스베르그는 러시아의 영토로 독일 문화의 전초기지 역할을 하고 있었다. 칸트는 Johann Georg Kant와 Anna Regina Reuter의 9명 자식들 중 6번째로 태어났다. 아버지의 직업은 마부?(humble saddler or leather worker)였으며 두 부부는 독실한 경건파 교도 (Pietist)였다. 경건파는 17세기에 일어난 종교적 부흥운동이며 18세기 독일 문화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이 운동은 같은 시기 영국에서 일어난 퀘이커교 (Quakerism)나 감리교 (Methodism), 그리고 유대교 하시디즘 (Hassidism)에 비교할 수 있다. 집안의 경제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칸트의 영특함을 알아본 교회 목사가 그에게 교육의 기회를 주선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칸트는 1740년 퀘니히스베르그 대학에 입학한다. 이 해는 또한 프레데릭 대제가 프러시아의 왕이 된 해이기도 하다. 프레데릭 대제가 왕이 되면서 수행한 첫번째 일 중 하나가 볼프를 Halle 대학의 교수로 다시 불러오는 것이었고, 이는 그가 계몽 운동을 지지한다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볼프는 라이프니쯔의 제자인데, 독일의 라이프찌히 대학에서 가르치다 라이프니쯔의 추천으로 할레대학의 정교수가 되었었다.) 그 후 빌헬름 1세 (프레데릭의 아버지)에 의해 국외 추방을 당했다가 프레데릭이 왕이 되면서 다시 할레로 돌아온 것이다. 빌헬름이 볼프를 추방하고 계몽주의를 반대한 것은 계몽주의자들이 대학에서 종교적 영감과 도덕적 경건성은 가르치지 않고 무미건조한 이성적 학문만을 가르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종교의 영향력이 강했던 이 시기에 볼프는 학문적 객관성을 유지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는 유교의 저작들을 철학적으로 탐구한 최초의 유럽인이었으며, 계몽주의의 아버지로 불린다.) 이러한 라이프니쯔-볼프 철학과 경건파 종교의 갈등이 칸트가 지적으로 성장하는 배경이 되었다.
칸트는 처음에 라틴 문학을 공부했는데 (그의 저작들에 등장하는 라틴어 인용은 여기에서 기인한다.) 얼마 못가 유명한 수학, 자연과학 교수였던 Martin Knutzen의 영향을 받았다. 크누첸은 볼프철학과 경건주의가 양립가능하다고 생각했으며 칸트의 자연과학적 사고에 막대한 영향력을 주었다.
칸트는 1744년에 대학을 잠시 중단하고 생활비를 벌기 위해 가정교사 생활을 시작했다. 그 기간 동안 칸트는 두 번이나 약혼했으나 가족을 부양할 만한 경제력이 없다는 이유로 결혼을 주저했으며, 기다리다 못한 약혼자들이 모두 다른 사람들과 결혼해버렸다. 가정교사 생활은 11년 동안 계속되었고, 1755년 대학으로 돌아와 철학 석사와 박사 학위를 동시에 취득하고 사강사 (Privatdocent: 대학에서 신분만 인정받고 강사료는 학생들에게 직접 받는 것) 생활을 시작한다. 그는 조금이라도 더 벌기 위해 닥치는 대로 강의했는데, 그가 한 강의에는 논리학, 형이상학, 윤리학, 자연 신학, 자연 과학 뿐 아니라 물리, 화학, 자연 지리학, 심지어는 군사 축성법, 불꽃 제조술 까지 포함되었다. 오늘날 우리가 지구과학이라고 부르는 학문은 사실상 칸트가 그 창시자이다. Universal Natural History and Theory of the Heavens (1755)에서 칸트는 우주 성운설을 최초로 주장하였다. (참고: 칸트-라플라스의 성운설 (-星雲設 Kant-Laplace nebular hypothesis))
자연과학에 대한 관심과 함께 칸트는 지식의 기초와 관련한 철학적 성찰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의 최초의 철학 저서는 New Elucidation of the First Principles of Metaphysical Cognition이었는데, 이 저작에서 우리는 그가 볼프의 형이상학 이론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으면서 동시에 그가 볼프 철학에 비판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철학자로서 칸트가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1762년 형이상학의 기초에 대한 에세이 공모에서 수상하면서 부터였다. 그 공모에서 일등으로 수상한 사람은 Moses Mendelssohn이었고 칸트는 On the Distinctness of the Principles of Natural Theology and Morals라는 제목의 에세이로 이등상을 수상하였다. 칸트의 윤리 이론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것은 Jean-Jacques Rousseau이다. 칸트는 처음에 감정에 기초한 윤리 이론에 매력을 느꼈으나, 루소의 Emile과 Of the Social Contract를 읽고 나서 보편적 윤리 이론으로 자신의 입장을 선회하였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윤리적 입장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발표한 것은 이십년이 지나서였으며, 그보다 먼저 과학의 기초에 대한 탐구 및 경험 과학과 형이상학의 관계에 대한 연구가 선행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1756년 퀘니히스베르그 대학에 논리학과 형이상학 교수 임용이 있었으나 칸트는 지원하지 않았고, 58년에 있었던 임용에서도 그는 자신이 자격 미달이라고 판단하여 지원하지 않았다. 그가 용기를 얻었던 것은 앞에서 언급한 62년의 에세이 공모에서 수상하고 부터였으며, 64년 같은 대학에서 시학 전공 교수직 제안을 받았으나 자연과학과 철학을 연구하고 싶은 마음에 받아들이지 않는다. 66년에 대학에서 사서직을 제안하였고 드디어 칸트는 대학에서 주는 첫 번째 봉급을 받았다. 1769년에는 Jena대학과 Erlangen대학 (독일의 유수 대학)에서 교수직 제안이 있었으나 동 프러시아를 떠난다는 것이 내키지 않아 또다시 거부한다. 그러나 사실상 칸트가 염두에 두었던 것은 다음해에 있을 퀘니히스베르그 대학 논리학 교수직 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도 무마되고 1778년에는 할레 대학에서 교수직 제안을 받았으나, 그는 또다시 퀘니히스베르그를 떠나지 않기로 결심했다. (이 대목에서 Wood는 칸트를 베토벤에 비유하고 있다. 베토벤이 귀머거리가 되고나서 걸작들을 쏟아내기 시작하였듯이 칸트의 삼대 비판서들도 그가 퀘니히스베르그에 고립되었을 때 탄생했다고 한다.)
마침내 칸트는 퀘니히스베르그 대학에서 교수로 승진 (사서직에서 교수로) 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Pregel강 위에 있는 조그만 섬에서 살았다. 그 섬에는 대학 건물과 교회가 있었는데 칸트는 도서관이 딸려있는 건물의 조그만 방에서 혼자 살았으며, 그가 자신의 집을 구한 것은 13년 후라고 한다.
1781년,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을 출판했다. 이로써 그는 인간 지성사에 획기적인 공헌을 하였다고 생각했으나, 그가 기대한 만큼의 반향이 없자 적잖이 실망하였다고 한다. 특히 칸트가 존경했다고 하는 Christian Grave가 쓴 리뷰에서는 칸트의 선험적 관념론을 버클리의 주관적 관념론을 답습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이에 격분한 칸트는 자신의 입장을 개진하기 위해 1783년 Prolegomena to Any Future Metaphysics를 출판하였으나 그의 비판 철학이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몇 년이 더 지나서였다.
이렇듯 칸트는 결혼도 하지 않고 평생을 가난하게 살았지만 이 시기부터 인생 역전은 시작되었고 1790년에 그가 받은 봉급은 그 당시 프러시아 교육계에서는 최고 수준이었다고 한다. 그가 59세 이었던 1783년에 그의 친구이자 퀘니히스베르그 시장이었던 J. G. Hippel의 주선으로 도시의 중심가에 있는 근사한 주택을 구입하였다. 이 집의 일층에는 그가 강의를 할 수 있는 홀이 있고 요리를 할 수 있는 주방이 있는데 요리사도 고용했다. 이층에는 칸트의 침실과 공부방, 거실, 식당이 있다. 삼층에는 칸트의 하인 Lampe가 기거했다. 식사라고 할 만한 식사는 저녁 한 끼였다. 2층에 있는 식당에서 칸트는 주로 손님들과 저녁을 즐겼다. 비록 칸트는 퀘니히스베르그를 떠난 적이 없지만 퀘니히스베르그가 항구였던 탓에 명망 있는 여러 외국인들이 그의 저녁 손님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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