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셸 푸코의 『감시와 처벌』 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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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미셸 푸코의 『감시와 처벌』 를 읽고
감시와 처벌의 역자 서문에서 보면, 고고학과 계보학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감시와 처벌 이전의 책들은 고고학적 방법을 사용한 반면, 감시와 처벌에서는 니체의 영향을 받아, 계보학적 방법을 사용한다(감시와 처벌: p.6~7)고 밝힌다.
이전 연구가 한 시대의 토대와 구조, 지적 담론의 규범과 법칙, 체계를 밝혀내기 위한 고고학적 연구였다면, 푸코의 계보학은 역사적 시각을 갖되 역사학과 구별되며 개별적 사건의 뿌리를 찾아 역사와 현재의 시간적 흐름을 통한 결정론적 시각을 거부하며, 오히려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둔 것이다(감시와 처벌: p.7~8). 계보학은 개인과 권력의 관계의 가능성, 해석 여지가 존재한다.
따라서 감시와 처벌은 역사적 서술을 통해서 감옥의 역사를 보여주는 의미보다는 그 안의 권력 양상을 통해 권력이 어떻게 어린아이, 노인, 범죄자, 노동자 등을 개체화시키는 지. 권력에 의한 주체의 개체화과정이 생겨나는 지를 보여주고자 한다. 그리고 그러한 감시의 방식은 감시와 처벌에서 하나의 감옥이라는 공간과 그 안의 범죄자들의 규율방식을 통해 감추고자 하는 것과 함께 일상에서 우리가 어떻게 통제받고 있는 지 까지도 설명할 수 있다. 이는 신체형의 방식의 특성(측정, 규칙, 의식)을 통해 처벌의 양상과 규율 형태를 드러내듯이 감옥 공간 구조(판옵티콘)를 통해 권력이 개인에게 작동하는 방식을 표면화한다. 범죄자가 왜 그러한 범행 동기 및 증거, 자백 등으로 형량은 정해진다. 그러한 의식은 잘 포장된 규칙과 측정 가능한 것들을 통해서 굉장히 객관적인 것처럼 보이게 되며, 그 안의 개인은 수행자로서 통제받게 된다.
푸코는 그 시대의 고문서, 법정 문서, 국가 문서, 그 당시의 잡지와 같은 기록을 통해 권력과 개인에게 끼쳤던 모습을 가시화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러한 감시와 처벌의 대상이 개인의 신체가 아닌, 저서의 표현을 빌리자면 신체의 감옥인 정신을 통제하고 훈육시키고자 한 것이다.
감옥의 죄수들에 대한 통제방식은 어느덧 확대되어, 학교, 군대 등에서 어떻게 통제하는 지를 관찰하는 지로 푸코의 시선은 이어진다. 즉, 잔인한 처벌방식의 일면에는 주체의 정신을 통제하고 감시자가 감시하고 있지 않음에도 스스로가 자신을 통제하고 사회가 원하는 방식으로 스스로를 이끌어갈 것을 내면화하고 있다. 이는 규율의 장에서 학교, 군대 와 같은 장소에서도 보여진다. 학생을 학교의 일정표대로 시간에 맞춰 움직이도록 통제한다던지 군대에서 작전을 세우고 훈련을 지킨다던지. 사회의 통제 메커니즘이 어느 정도 작동되는 것이다. 너무나도 당연하게 여겨지는 통념(?)에 대해 푸코는 다른 관점으로 적용하여 뒤집고자한 것 같다. 이는 고고학에서 할 수 없는 방법이며, 기법이라고 생각된다.
우리가 일상에서 당연하게 받아드리는 학교와 병원, 법정에서 개인은 학생, 환자, 피고인 등으로 각 역할을 수행하기를 기대된다. 신체형의 의식에서 배역을 맡은 사람들이 각자 역할을 완수한다는 표현처럼 말이다. 기술과 지식을 통해 사회전체에 투영되는 개인들의 행위가 존재하며, 그 행위의 실체에는 개인들의 통제된 정신이 있게 된다.
푸코가 말하는 각 일상의 권력 속에서 개인의 모습은 어떠할까? 구조 안에서의 개인과 개인간의 요동치는 역학관계를 잘 설명해낼 수 있다면 좋겠다.
요새 나는 부쩍 각기 다른 공간에서의 개인의 역할에 대해 생각이 많다. 학문으로서 보는 지점과 실질적인 현장에서 느껴지는 간극이 크다. 시민사회와 국가, 그리고 그 안의 사람들, 충돌하고 갈등하는 것이 학문으로는 건강하게 보이지만, 실질적으로 두 공간을 마주해본 나로서는 이상하게도 혼란스럽다. 사실 어떤 것이 옳은 것인지 그른 것인지도 판단이 서지 않는다. 어느 하나도 완성된 상태가 아니며, 그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열심히 하고자 하는 것이지만, 마주하는 방식이 내가 원하던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원하더라도 안 되는 것이 있음을 체념하는 시기라고도 생각되고, 내가 지금 잘 풀리지 않는 방향과 원하지만 보이지 않는 방향 사이에서 고민하는 것 같다. 하지만 아마도 고민 후에 내리는 결정까지 체념은 아닐 것이다. 단지 견디고 버텨보는 식의 유보겠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