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사기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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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서평 사기열전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사기열전
사기는 상고시대의 황제로부터 진한의 무제에 이르기까지 약 2천 수백 년 간의 일을 기술한 통사로서, 역대 왕조의 편년사인 본기 12권, 연표 10권, 부문별 문화사인 서(書) 8권, 열국사인 세가 30권, 개인의 전기집인 열전 70권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즉, 사기는 130 편으로 구성되었으며, 그 중 열전이 70 편이다. 열전은 분량으로는 사기 전체의 반 이상이며, 내용에 있어서도 사기의 다른 부분(본기, 세가)보다 상당히 좋다고 평가된다. 한 편에 한 인물만 논한 것이 아니므로 사기 열전에 나오는 인물은 적어도 200 명이 넘는다. 사기 열전은 사마천이 기원전 1000 년경에서 기원전 100 년경까지의 중국에서 활약한 여러 사람들의 삶에 대해 분석한 글이다. 사기는 기전체 방식이다. 즉 연대기가 아니라 인물이나 사건별로 기록하였다. 사마천이 창시한 본기, 열전 등과 같은 서로 성질이 다른 역사 기술 방식을 기전체라 하며 이는 반고의 한서에 승계 되어 송대의 사마광이 자치통감에서 완성한 편년체와 함께 중국 역사 기술의 기본적 형식으로 평가되어 있다.
소설 삼국지(이 사기가 저술되고 300 년이 지난 시대)에서도 나라가 혼란스러울 때 수습 방법을 찾기 위해 조용히 앉아 사기 열전을 읽는 모습이 나온다. 조선조 중엽에도 마음을 기르기 위해 사기 열전을 읽는 우리 선조의 모습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세종대왕께서 우리 선비들이 사서 삼경만 읽고 역사를 읽지 않는다고 걱정하신 내용이 있는데 그 역사책 중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던 것이 이 사기일 것이다. 이렇게 역사 속에서 사기는 그 가치를 인정 받아왔다.
이릉- 사마천은 패장 이릉을 변호해 준 일 때문에 무제의 미움을 사서 궁형이라는 처형을 받았다. 궁형(宮刑)이란 남근을 떼어 버리는 형벌로서 일명 부형(腐刑)이라고 한다. 그 이유는 떼어 낸 자리의 상처에서 썩는 냄새가 나기 때문이기도 하고, 썩은 나무처럼 열매(자식)를 맺지 못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남자가 남자 아닌 존재로 되는 것이고, 더 심하게 말하면 인간이 인간 아닌 존재로 되는 가혹한 형벌이다. 형법상으로는 사형 바로 다음에 해당하는 형벌이지만, 그 굴욕의 치명성은 사형에 비할 바 아니다.
이렇게 무서운 형벌을 받으면서까지 사마천이 변호했던 이릉이라는 자는 과연 어떤 사람이었을까? 사마천의 일생을 바라보다보면 이릉에 대해 자연 흥미가 생긴다. 이릉은 사기열전에 나오는 이릉의 자손이다. “장군 이광은 활을 들고 식인 호랑이가 자주 나타나는 산을 오르고 있었다. 여러 가지의 일로 마음이 안정되지 않아 사냥이라도 하고자 함이다. 이미 해는 져서 어둡다. 갑자기 눈앞에 커다란 호랑이가 나타났다. 긴장된 상태에서 이광은 활을 힘껏 당겨 호랑이를 향해 쏘았다. 화살은 정확히 호랑이의 몸통에 맞았다. 호랑이가 움직이지 않는 것을 확인한 후 호랑이에게 다가가보니 호랑이가 아니고 호랑이처럼 생긴 바위였고 화살은 바위 깊숙한 곳에 꽂혀있었다. 화살이 바위에 박힌 것은 처음이라 이상하게 생각하고 이광은 다시 한 번 원래 화살을 쏜 위치에서 힘껏 활을 쏘아보았지만 모두 튕겨 나왔다. ”
이 이야기는 사람이 한 곳에 정신을 집중하면 의외의 힘이 생긴다는 것을 말할 때 자주 사용하는 내용이다. 무제에게는 처음에는 좀처럼 아들이 태어나지 않다가 궁중 가수인 위자부 라는 여자를 후궁으로 받아들여 위자부 에게서 아들이 태어났고, 그 아들을 태자로 삼고 위자부를 황후로 삼는다.
위자부의 동생인 위청과 위청의 다른 누이의 아들, 즉 위청의 생질인 곽거병 장군이 만리장성을 넘어 흉노를 토벌하는 큰 공을 세운다. 흉노에게 무서운 존재로는 신출내기 장군인 위청과 곽거병이 아니고 바로 역전의 명장인 이광 장군이었기 때문에 방어시 주력부대로 이광군을 막았고, 위청과 곽거정은 물론 장군으로서의 능력도 있었지만 일종의 어부지리로 대승을 거둔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위청과 곽거병이 대승을 거둔 반면 이광은 자기의 유명세로 인하여 본의 아니게 처참한 패배를 맛본 것이다. 논공행상 때 이러한 사실은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 이광의 두 아들은 아버지의 그러한 점을 알고 다른 전쟁에서 맹렬히 싸우다 모두 전사했다.
이광의 손자인 이능도 흉노와의 전쟁에서 용감히 싸웠지만 결국 흉노의 포로가 된다. 흉노는 그 유명한 이광의 손자인 이능을 정책적인 면에서 이득을 보기 위하여 사형시키지 않고 항복하라고 끈질기게 회유했고 결국 이능은 항복하고 흉노의 여자와 결혼까지 하여 흉노 땅에서 살았다. 그 당시 이릉은 굴지의 명장이었다. 불과 5천의 병사를 이끌고 흉노 10만의 기병을 상대하여 그중 1만을 넘는 흉노의 군사를 살상했으나 무운도 없이 그만 흉노의 포로가 되었다. 이 일에 대해 궁중에서는 비난이 엄청났는데 이 때 이능을 열렬히 변호한 사람이 바로 사마천이다. 이릉이 얼마나 눈부신 전과를 올렸는가는 누구나 다 뻔히 알 수 있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무제는 그 결과에 격분하여 이릉을 처벌하기 위한 조의를 열었다. 그러자 신하들은 무제의 속셈을 알아차리고 이구동성으로 이릉의 잘못을 늘어놓았다. 그러자 사마천은 그의 양심과 정의감이 명령하는 그대로 이릉의 공적을 찬양하면서 임금에게 아첨만 하는 신하의 무리를 규탄했다. 그 결과 그는 사실을 왜곡하고 남을 비방했다는 죄목으로 투옥당하는 몸이 되었다. 이 사건으로 사마천은 이능과 같은 비겁한 부류에 넣어져 무제로부터 형벌을 받게 되는데 남자에게는 가장 치욕적인 형벌인 궁형(생식기를 제거하는 벌)이었다. 남자로서는 이보다 더한 굴욕은 없었다. 대부분 남자들에게는 궁형을 당하면 차라리 자살을 하거나 처음부터 궁형이 아닌 사형을 택했건 것이 당시의 일반적인 생각이었다. 하지만 사마천은 그럴 수가 없었다. 그 당시까지도 중국 역사가 정리되지 않아 일관성이 없었는데 사마천의 부친이 정리를 하는 도중에 죽었다. 부친이 죽으면서 사마천에게 꼭 정리하다 만 역사를 반드시 완성시키라는 부친의 유언을 무시할 수 없었고 그 동인 역사 편찬을 위해 모아둔 궁내의 그 많은 사료를 그대로 썩힐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릉이 한을 칠 흉노의 군사들을 훈련시키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사실은 와전된 것이었으나―무제는 이릉 일가 멸족시키고, 사마천에게도 사형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사마천은 죽어서는 안 될 까닭이 있었다. 절의 때문에 목숨을 잃게 되리라는 것은 이미 굳게 각오한 바였지만, 그에게는 망부의 유지를 받들어 역사의 저술을 완성해야 한다는 막중한 책무가 주어져 있었다.
그 당시 사형을 면하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었다고 한다. 한 가지는 50만 전이라는 막대한 벌금을 내는 것이었고 또 하나의 방법은 스스로 궁형을 받겠다고 나서는 일이었다. 집안이 부유하지 못한 그로서는 벌금을 낼 수가 없었기 때문에 결국 사대부로서 가장 큰 굴욕인 궁형을 택함으로써 삶에 대한 치욕을 천하에 드러낸 것이었다. 그때가 기원전 98년이었으니, 사마천은 40세 전후의 장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