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남양군도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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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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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남양군도’를 읽고
남쪽 바다의 섬들이라는 뜻의 남양군도는 지금은 사라진 이름이다. 시간적으로는 우리의 조선시대와 일제 침략기에 존재했던 공간이다. 제국주의 일본을 통해서 한국인의 역사와 연결된 곳이다. 그러나 한국학계는 남양군도에 대한 관심을 별로 기울이지 못했다. 지금 이 지역은 한국 신혼부부가 선호하는 신혼 여행지이자, 프로야구전지 훈련지로도 알려져 있다. 텔레비전의 인기 오락 프로에서는 쪽빛 바다에서 다이빙과 자연을 만끽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여행사들은 각종 체험 프로그램을 만들어 이곳으로의 여행을 유혹한다.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상상력 사전’에서 나왔던 말처럼 우리가 보는 역사는 승리의 역사 일뿐이라는 것인가 생각하게 되었다. 누군가가 기록하고 누군가에 의해 지금의 현재도 미래의 어떤 사람의 중심으로 작성이 될지 알 수가 없는 부분이다. 그렇지만 100여 년 전 이곳에 일본제국이 발을 들여놓기 시작하자 일본사람과 함께 우리 조선 사람도 많이 건너가 살았던 곳이다. 일본제국이 남양군도를 점령하고 통치하기 시작한 이래, 조선 땅에는 줄곧 남양군도에 관한 소식이 전해져 왔고, 많은 사람들이 노동자로, 병사로, 위안부로 남양군도로 갔다. 때로는 돈을 벌 수 있다는 막연한 기대를 갖고 모집에 응해 자발적으로 찾아간 경우도 있고, 전쟁 말기에 강제로 군사 시설을 구출하는 현장에 끌려가 일하고, 전투가 벌어지던 현장에 묶여 있다가 간신히 살아 돌아온 사람들도 많았다. 그런 점에서 당시 조선인에게 남양군도, 즉 미크로네시아는 어떤 면에서는 기회의 땅이기도 했고, 다른 면에서 보면 강제동원의 과롭고 힘들었던 역사가 남아 있는 고통의 땅이기도 했다. 그런 점을 생각하면, 미크로네시아 역시 한국 역사의 한 부분을 차지하는 지역이다.
책에서는 남양군도에 대해 조사를 했는데 하나는 남양군도에 관련한 기존 연구성과를 국내는 물론 일본과 미국의 연구 성과를 정리하고 주요 문헌을 수집, 분석하는 작업이었다. 둘째는 일본군이 남겨놓은 전쟁 유적과 그곳에서의 조선인 강제동원 노동자와 위안부 관련 증언을 집중적으로 청취하는 것을 목표인 현지조사였다. 일본인들이 흔히 남양리라고 말할 때, 이 개념에는 필리핀,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는 물론 싱가포르까지 포함한 넒은 영역의, 오늘날 동남아시아라고 부르는 지역이 포함된다. 그런데 권명아가 보여준 남방에 대한 인식에는 동남아시아를 포함한 남양리라는 넓은 지역과 구체적이고 좁은 남양군도 지역이 함께 담겨 있고, 섞여 있다. 개념을 확실히 해야하는 이유는 그 당시의 개념과 현재의 개념이 다르기 때문에 조사를 한 과정의 개념을 정확히 하지 않는다면 역사를 바라볼 때 매우 혼란스러울 것이다. 역사적으로 과정을 보면, 유럽인들이 대항해시대를 거치면서 태평양 섬들을 방문하기 시작했고, 태평양 섬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그들을 맞아 교류를 했던 것이다. 하지만 양자는 결코 평등하지 않았다. 대단히 일방적인 관계에서 정복, 지배, 학살, 착취가 진행되었다. 유럽인들이 원하는 것은 황금이었고, 후추, 유향, 정향이었다. 동시에 자신들의 종교를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것이었다. 그들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하면 죽음이 뒤따랐다. 뒤늦게 식민지 경쟁에 뛰어든 독일은 미크로네시아에 관심이 아주 많았다. 하지만 그들의 관심이라는 것이 기업이 주도하는 방식으로 주로 경제적인 개발을 통한 수탈하는 것뿐이었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거치면서 일본의 육군과 해군은 자신들이 제국발전을 위한 해외진출의 주체라고 자부하고 있었다. 그러나 부국강병을 위한 해외진출 방식에 관해서는 생각이 크게 달랐다. 육균이 중국 동북방면, 즉 만주지역을 중심으로 북방진출을 적극 추진하는 것을 보면서, 해군은 대륙들과의 마찰을 피하면서 추진하는 ‘평화적=경제적’ 남방진출을 주장했다. 해군은 군정을 시작한 초기부터 지역산업의 육성을 위해 남양군도 지역에서 시작했다. 그리고 제당업을 육성시키기 위하여 투자를 유치하는 데 관심을 기울였다. 당시 일본은 전시호황 시대로 들어서고 있었다. 남양군도를 장기적으로 일본의 영토로 만들고 싶어 하던 일본 정부와 해군은 남양군도 투자 기업의 실패와 실업 노동자 처리 문제가 국제여론을 악화시키지나 않을까 걱정했다. 그래서 척무성, 해군, 제국의회는 새로운 회사의 설립을 의논하게 되었다. 남양흥발은 기존의 남양청의 전폭적인 지원을 바탕으로 남양흥발은 사탕수수밭을 일구고, 제당공장을 설립하면서, 제당업의 기반을 닦았다. 니시무라척식과 남양식산 두회사의 기존 시서을 인수하는 한편, 독일에서 새로운 기계설비를 주문하는 한편으로는 농장과 제당 공장을 연결하는 경편철도를 깔았다. 남양척식주식회사는 척무대신의 관할하에 두고, 사장은 척무대신이 임명했지만, 경영에는 해군 군인, 의회 의원, 동양척식과 남양흥발 관계자들과 관여했는데, 최대의 주주는 남양청이었다. 주된 업무는 척식 사업의 추진과 기업에의 자금 공여, 척식사업과 이민 사업을 통해서 외남양으로의 더욱 더 진출을 촉진하는 것이었다. 이민사업에서는 주로 남양청에 의한 ‘식민 구획지’와 자기 회사 사업에 이민을 동원했다. 한편 남양흥발은 제당업뿐만 아니라 어업의 발전에도 힘을 기울였다. 1933년에 남양흥발은 팔라우와 사이판에 가다랑어포 공장을 설립했다. 1935년에는 자회사로서 남흥수산을 설립했다. 남흥수산은 팔라우에 본사를 두고 팔라우, 사이판, 폰페이, 축에 영업소, 야이즈에 출장소를 설치해, 종업원 약 580명인 대어업 회사로 성장했다. 회사는 가다랑어포의 제조뿐만 아니라. 어항부두, 해안제방시설, 제빙소, 냉동냉장시설, 갠광장 등의 건설 청부를 맡았다. 1937년에는 남양척식이 남흥수산의 주식의 절반을 취득해서, 자기 계열회사로 만들었다. 1942년의 시점에서 남양군도에서 제조된 가다랑어포는 일본 가다랑어포 전체 소비량의 약 50%를 차지했다. 같은 해, 가다랑어포는 남양군도의 전 수산물 제조의 약 90%를 차지했다. 남양산 가다랑어포는 일본 국내산 가다랑어포의 시세에 큰 영향을 줄 정도가 되었다. 1940년에 이르기까지 남양개발의 사업은 남양군담이 아니라, ‘외남양’또는 ‘표남양’이라고 부르는 동남아시아를 포함한 넓은 태평양 지역 각지로 무한대로 확대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외남양’에서의 사업은 이익과는 상관ㄹ없이 진행된 사업이었다. 아마 마쓰에 자신이 그렇게 하고 싶엇 사업을 확대했다기보다는, 일본 국책 수행을 위해 필요하다고 정부, 또는 군이 요구하는 대로 적자를 각오하고 전개한 것이었기 때무에, 회사의 경영상태를 악화시키게 되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하고 태평양전쟁이 끝났다. 하지만 남양군도에서는 그보다 훨씬 전에 전투가 끝났다. 사이판에서는 1944년 7월 9일에, 티니안에서는 1944년 8월 초에 미군이 전투 종료 선언을 했다. 이어서 팔라우에서는 9월에 시작한 전투가 66일 동안 글다가 12월에 마무리 되었다. 남양군도는 모두 미군 통치에 들어갔다. 태평양 전쟁에서 이긴 미국은 일본의 남양군도를 접수하고. 1972년 까지 오키나와를 지배했다. 남양군도로 이주해 살았던 오키나와 사람들은 차곡차곡 쌓아가던 생활의 기반을 일본의 패배와 함께 다 잃어버렸다. 그러나 강제로 돌아온 그들의 공향은 더 이상 일본이 아니였고,국가로부터 버림받은 땅이 되어 있었다. 미국은 남양군도로 이주한 오키나와 농민들에게는 생명과도 같았던 농토를 불도저로 밀어 군사기지를 만들었다. 전쟁의 승전국이 된 미국은 패배한 나라의 사람들의 삶에 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또한 일본의 전쟁책임자들은 종전 후 미국에게 오키나와를 내어주는 것에 그리 개의치 않았다. 국제사회로부터 비난을 무마하기 위해, 전쟁 동안 적국이었던 미국의 제의에 재빨리 동조하는 선택을 취했다.
책에서 남은 과제는 크게 두 가지로 설명한다. 하나는 남양군도에 갔던 조선인의 발자취를 찾아 재구성하는 것이며, 그리고 또 하나는 현재 미크로네시아에 살고 있는 주민의 입장에서, 그들의 역사와 문화를 통해서 그들을 이해하고, 그들의 미래를 함께 생각해보는 일이다.
이 책을 읽고 나서 무엇인가를 해야겠다는 다짐으로 주말을 생각만 하고 시간을 보낸 뒤 후회로 주말을 마무리하던 어느 주말저녁, 나는 또 생각 없이 텔레비전을 틀었다. 재방송 프로그램을 보던 중 인기프로인 ‘무한도전’에서 일본에 있는 우토로 마을을 비추는 것이 보였다. 나에겐 나름 생소하지만 이번 수업에 일본이 많이 연관이 되어 있기에 주의 깊게 살펴보게 되었다. 프로그램에서는 대한민국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 가고 있는 우토로 마을의 주민들에 대한 죄송한 시선을 보여주고 있었다. 프로그램이 끝난 후 우토로 마을을 찾아보았다. 시간이 멈춘 마을이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우토로 마을은 1945년에 멈춰있었다. 1988년 서울 올림픽으로 떠들썩했던 대한민국과 비슷하게 우토로도 떠들썩했다. 바로 수도가 깔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직도 하수도도 정비가 안되어 비만 오면 마을 전체가 빗물이 고여 심각한 위생상의 위험이 직면해 있다. 일본의 어떤 마을과도 다른, 차별과 은폐의 기운이 억누르고 있는 마을이다. 우토로 마을은 재일동포들에게는 살아있는 일제만행의 산증인이자 역사이다. 이제 곧 우토로의 역사는 위안부와 같이 옛 모습들이 사라질 것이다. 나는 학교를 12년간 의무적으로 다니며 대한민국의 역사를 배웠다. 하지만 이러한 역사는 대한민국의 역사에 초점이 되지 않는다. 내가 배웠던 역사는 조선의 ‘용비어천가’의 현대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도 기억이 나는 것은 우리나라의 건국 역사의 시간적 흐름뿐이다. 책에서 살펴볼 수 있었던 역사가 내가 배워야할 역사라고 뚜렷하게 말할 순 없다. 하지만 역사를 바라보는 시선이 한 곳에만 멈춰있다면 그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