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감 -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에서의 진정한 나와 사랑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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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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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에서의 진정한 나와 사랑의 의미
시대의 흐름은 점점 더 빨라지고 있고, 소비 패턴과 대중문화의 변화 속도 또한 가속화되고 있다. 종교는 기호 상품에 불과한 것처럼 느껴지며, 많은 종교인들은 신에 진지하지 않고 물질에 진지하면서도 겉으로는 가장 엄숙한 체 한다. 가장 윤리적인 체 하며 낙태, 뇌사, 매춘 이슈를 사뭇 진지하게 다루는 이들은 단지 이런 이슈들이 그들의 이기적인 욕망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관심을 가지면서도 가장 근엄한 척 하고, 이를 정의와 불의로 나누어 심판하려 한다. 이처럼 현대 사회는 물질과 쾌락 중심의 이기적인 사회일 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몸의 욕망에 따라 행동하며, 단지 차이점은 그 행위 방식이 얼마나 세련됐느냐에 달려있을 뿐이다. 몸의 욕망에 따르는 이들을 사회는 비난하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열광하며 남들보다 더욱 더 자극적으로 따르라고 부추긴다.
하지만, 가끔씩 누구에게나 허탈함과 의아함의 시간이 찾아온다. 몸의 욕망만을 바라보며 따라가는 것에 대한 회의감이 들기 때문이다. 이럴 때 사람들은 소위 말하는 ‘힐링 서적’을 찾아 서점을 헤맨다. 그런데 놀랍게도, 사실은 당연한 것이지만, 힐링 서적은 킬링 서적이다. 종교마저도 자본주의의 원리에 의해 돌아가는 사회에서, 이러한 서적 또한 결국 동일한 자본주의의 원리를 돌려서 말하는 것이 대다수이다. 이런 현상이 현대 사회에 들어 급속화된 것은 맞지만, 사실 현대 사회의 특징만은 아니다. 문명의 시작은 몸의 욕망을 가장 잘 따르던 이들이 세우기 시작한 것이기 때문에, 문명은 이미 그 시작점에서부터 이러한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인간이 몸의 욕망에 얽매여 사는 것이 당연한 것일까. 나는 결국 나의 몸에 불과한 것인지 의문이 든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나의 몸이 당연히 아니며, 진정한 나는 나의 영적 자아이다.
구약 성경에서, 아담은 에덴동산에 있는 선악과를 따먹는다. 현대의 많은 종교인들은 이 때의 아담의 행위 때문에 인간은 원죄를 가지고 태어나게 되었다며 아담을 비난한다. 하지만 사실상 아담은 선악과를 먹을 수밖에 없었다. 선악과는 에덴동산 한 가운데에 떡하니 보라는 듯이 서 있었으며, 죽지 않기 때문에 죽음이 뭔지 모르는 아담에게 ‘먹으면 너 죽는다’는 협박이 통할 리 없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탕자의 사례에서 보듯이, 사랑에 대해 알기 위해서 인간은 한 번 일탈과 방황을 경험해야 하기 때문에, 결국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것은 신의 뜻임을 알 수 있다. 선악과는 세 가지 욕망, 즉 육체의 욕망, 자극의 욕망, 그리고 비교의 욕망을 모두 나타내는데, 아담은 이것을 먹음으로써 신의 말 대로 죽게 된다. 여기서 죽는다는 것은, 생물학적 죽음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영적 자아인 진정한 나의 죽음, 행복의 죽음, 몸의 죽음, 향유의 죽음, 관계의 죽음, 인격의 죽음, 이데올로기의 죽음, 존재의 죽음, 의미의 죽음, 마지막으로 역사의 죽음을 의미한다.
성경에 나타난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후 벌어지는 일은 포스트 모더니즘의 특성을 정확히 드러낸다. 자신의 몸적 정체성을 자각한 아담이 신을 피한 것과 같이, 포스트 모더니즘에서 서구적 신 관념은 관심의 대상에서 벗어난다. 사람들은 자극과 욕망이 이끌리는 대로 행동하며, 성적 쾌락을 자유롭게 추구한다. 획일성을 추구하던 관념에서 벗어나 다양성과 타자성을 선호하며, 사회의 구조는 수직적에서 수평적으로 바뀐다. 합의에 기초한 건전한 이기주의를 넘어서 공존 중심의 합리적 이기주의로 나아간다. 이런 특성들은 얼핏 보면 이전 사회에 비해 더 성숙해진 느낌이다. 그러나 자세히 살피면 결국 방식이 교묘해진 것일 뿐, 여전히 추구하는 것은 몸의 욕망이며, 오히려 그것에 중독된 정도가 더욱 강해진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때의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라고 믿는 몸의 욕망에 더욱 몰입하고 집착한다.
포스트 모더니즘 이후의 사회는 융합사회를 표방한다. 제 3의 물결과 그 이전 물결들의 장점만 모아서 융합된 사회로, 수직적 구조와 수평적 구조가 더해진 십자가형 패러다임을 지닐 것이다. 따라서 사회적으로 십자가형 융합 인재가 요구될 것이며, 단순한 다양성과 타자성을 인정하는 것에서 상생과 공존을 지향하는 사회로 나아갈 것이다. 그러나 앞서와 같이, 실질적인 변화는 오지 않을 것이다. 사회는 여전히 몸적 가치에 집착할 것이기 때문이다. 십자가는 두 가지 의미를 지니는데, 구원의 생명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공동묘지의 죽음 또한 의미한다. 상생과 공존을 외치지만, 역설적으로 계층 간 세대 간 갈등은 극단으로 치달을 것이다. 십자가의 본질은 절대적 갈라짐과 분리에 있기 때문에 사회의 모든 면에서 양극화가 진행될 것이고, 사람들은 이전보다 더 불행해지며 사랑은 사라지고 패륜이 빈번하며 묻지마 범죄가 성행할 것이다. 과학은 놀라운 속도로 발전하고, 사람들은 더욱 더 행복감에 목말라하지만 이들이 행복해질 수는 없다.
앞서 봤듯이, 문명이 발전할수록 인류는 행복과 더 거리가 멀어질 것이다. 그 이유는 사람들은 행복감을 행복으로 착각하고 이에 끊임없이 매달리고 있으며, 사랑을 할 수 없는 존재임에도 스스로 사랑을 할 수 있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인류가 사랑을 할 수 없는 이유는 사랑을 모르기 때문이다. 태어난 후 진정한 사랑을 받은 적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사랑을 알 수 없다. 하지만, 자궁 속의 아기와 산모의 관계에서 우리는 사랑의 진정한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타자인 산모와 타자인 아기가 처음 만났을 때, 산모의 몸은 아기를 침입자로 여기고 죽이려 하지만, 아기는 스스로 태반을 둘러 산모의 몸과 경계를 짓는다. 이는 아기가 산모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겠다는 의미이다. 산모의 몸도 이때 태아를 죽이려는 것을 그만두고 탯줄로 아기와 이어져 영양분을 공급하지만, 산모의 혈액을 공급하지는 않는다. 즉, 아기와 산모는 하나가 되지 않고 둘로 남는다. 하지만 이는 또한 아기가 사랑인, 산모 안으로 용해되어 하나가 되는 것과 같다. 아기는 산모 안에서 스스로의 존재를 증명한답시고 걸어 다니려고 하거나 말을 하려 하지 않는다. 단지 가만히 산모가 공급해주는 영양분을 받는다. 따라서 이는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인 만남이다. 즉,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는 수평적 타자성과 나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주는 수직적 동일성의 결합인 십자가의 사랑인 것이다.
바울은 이런 십자가 사랑에 대해,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며 ……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고 표현했다. 이 의미는 사랑을 하기 위해서 이런 모든 속성들이 완전해야 한다는 것인데, 완전하다는 것은 생각으로도 단 한 번의 어김이 없어야한다는 것이다. 이런 것은 그 어떤 인간도 할 수 없으며, 오로지 완전한 사랑의 존재인 신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사랑을 할 수 없으며, 사랑을 알기 위해선 먼저 사랑의 존재로부터 씨를 받는 여자가 되어야 한다. 단군신화의 호랑이가 아닌 곰이 되기 위해서, 몸의 욕망을 버리고 마늘과 쑥을 먹는 고난과 시련을 완전해지는 날인 100일 동안 참으며 사랑을 받을 준비를 하는 것이다.
진리는 간단하다. 부모가 자녀를 진정 자녀로 만드는 것, 이것이 바로 사랑이다. 자녀가 원하는 것을 해주는 부모가 아니라, 자녀가 해야 할 것을 해주는 부모다. 따라서 사랑은 세 단계로 이루어진다. 첫째, 무에서 유를 만든다. 이는 즉, 생명의 씨로 아들을 만듦을 나타낸다. 둘째, 아들이 자기 부정의 시간을 가지며 방황을 하지만, 끝내 아버지의 뜻을 깨닫고 다시 아버지와 연합한다. 마지막으로, 아들이 자기 안에 있는 그 사랑의 씨를 열매 맺는다. 몸적 욕망을 추구할 때의 아들은 절대 위 세 단계의 사랑을 원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아들이 원하는 것만을 들어주는 부모는 절대 아들에게 사랑의 열매를 뿌릴 수 없다. 반대로, 아들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욕망만을 고집한다면, 절대 사랑의 씨앗을 받을 수 없다. 그러므로 사랑의 씨앗을 받지 못한 우리는 사랑할 수 없음을 깨달으며, 자궁 속의 아기와 같이 가만히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자세를 취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