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에 굴복한 아웃사이더 빌헬름 마이스터의 편력시대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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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현실에 굴복한 아웃사이더
-빌헬름 마이스터의 편력시대를 읽고-
우리나라에서 일반적 이해를 위해 흔히들 성장소설이라고 부르고 있지만, 성장소설의 원산지라 할 수 있는 독일문학 속으로 깊이 들어가 보자면, 자연히 교양소설이란 개념과 부딪히게 된다. 교양소설이라 함은 한 인간이 유년시절부터 청년기를 거쳐 장년기, 또는 노년기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한 인격체로서 성숙해 가느냐 하는 과정을 그리는 소설을 말하는데, 독일문학사에서 전범으로 꼽히는 교양소설은 1795/1796년에 나온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이다.
괴테는 이 작품에서 상인의 아들인 빌헬름이 어떻게 유년기의 주관성으로부터 벗어나고, 어떻게 체험을 통한 깨달음의 과정을 거친 다음, 어떻게 사회와 화해하여 그 사회의 일원으로서 조화롭게 살아가게 되는가를 보여준다. 하지만 실제로 그것은 조화가 아닌 현실에 굴복하는 것이다. 게다가 그는 자신의 실패를 인정하지 않고 현실을 미화하며 자신을 합리화한다. 이건 질풍노도의 시기를 거친 작가인 괴테 자신의 사상적 변화와 일치한다.
소설 초반 빌헬름의 성향은 젊은 베르터의 슬픔의 주인공 베르터와 아주 흡사하다. 예술에 마음을 두고, 진정한 인간성을 한평생 추구하려는 태도를 보이는 전형적 질풍노도 시기의 주인공이다. 이 소설의 초고가 베르터를 낸 지 단 3년 만에 나왔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와 같은 유사성은 당연해 보인다. 그러나 이 소설이 새로운 제목을 달고 완성된 건 그로부터 20여 년 후였다. 그동안 프랑스 대혁명과 같은 정치적 격변이 있었고 괴테의 사상은 많은 변화를 겪었다. 괴테는 더는 베르터 같은 주인공에 공감할 수 없었고, 소설이 진행해나감에 따라 빌헬름을 현재 자신에 가깝게 성장시켰던 것이다.
초반부에 빌헬름은 아웃사이더에게 있어 최초의 고비를 겪는다. 바로 현실과 대립하는 자신의 예술적 기질에 대한 고뇌에서 오는 문제의식이다. 빌헬름은 부유한 시민계급의 자제로 태어나 상인의 길을 가야 하지만 끝까지 연극에의 열정을 버리지 못한다. 고뇌하던 그는 갈림길에 선 청년이란 시를 써 상업의 여신과 시의 여신을 등장시켜 그 갈등을 해소하려한다. 상업의 여신은 돈만 밝히는 지독한 노파지만 시의 여신은 우아하고 완성된 인격을 가진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빌헬름은 명백히 예술의 세계로 마음을 다잡은 듯했다. 그러나 자신을 예술의 길로 이끌어줄 여신이라 생각했던 연인 마리아네가 배신하자 그 시를 불태우며 예술과의 결별을 고한다. 그 아픔을 잊으려고 그는 현실에서 열심히 상업수련에 몰두한다. 이런 빌헬름의 변화를 흡족하게 생각한 아버지는 그를 출장여행에 보내게 되고, 빌헬름은 이 여행을 통해 오히려 예술의 길로 또다시 빠진다.
유랑극단에서 라에르테스, 필리네 그리고 신비로운 소녀 미뇽과 연주솜씨가 매우 뛰어난 하프타는 노인을 만나고 그들과 정을 쌓게 된 그는 한동안 그 곳에 머무른다. 그러면서 백작의 성에서도 공연을 하게 되고 시중에서 햄릿공연을 하는 등 여러 가지 연극을 체험하다가 결국 한계를 깨닫는다. 그 시대의 연극은 오로지 예술성을 위한 것일 수 없으며, 언제나 후원을 해주는 귀족의 취향에 맞출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배우들도 대부분 완전한 예술의 경지에 다다르려고 성실히 노력하는 자들이 아니라 그저 나르시시즘에 빠진 허영심 많은 자였다. 이러한 연극계에 환멸을 느낀 빌헬름은 결국 다시 예술의 세계를 떠나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여기서 빌헬름이 크게 착각한 것이 있다. 빌헬름이 느낀 환멸은 어디까지나 부정적 현실에 부딪혀 진정한 곳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예술의 일그러진 모습이었을 뿐이지 연극, 즉 예술 그 자체에서 느끼는 환멸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빌헬름은 그것을 확대시켜 예술 전체를 부정했다. 그러고 나선 지금까지 자신이 그릇된 길을 걸어왔음을 확언한다.
이것이야말로 진정 잘못된 생각이고 진짜 비겁한 도피였다. 베르터였다면 이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현실에 부딪혀 파멸할지언정 결코 자신이 걸어온 진정한 길을 부정하고 현실에 고개 숙이지 않는다. 빌헬름은 끝까지 예술을 믿었어야 했다. 어디까지나 예술을 통한 자기실현을 최고의 목표로 두고 어떤 한계가 와도 그것을 극복해야 했다. 귀족들이 아무리 제약을 가해도 그것을 교묘하게 뒤집어 자신이 원하는 바대로 공연하고, 배우들에게 끊임없이 진정한 예술인의 자세를 깨우치게 하려고 노력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나약했던 것이다. 그런 고난을 계속 겪으면서까지 예술의 길을 걷기가 두려웠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