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해양유민의 사회사 - 15~17세기 제주도민들의 유랑과 생존

 1  조선시대 해양유민의 사회사 - 15~17세기 제주도민들의 유랑과 생존-1
 2  조선시대 해양유민의 사회사 - 15~17세기 제주도민들의 유랑과 생존-2
 3  조선시대 해양유민의 사회사 - 15~17세기 제주도민들의 유랑과 생존-3
※ 미리보기 이미지는 최대 20페이지까지만 지원합니다.
  • 분야
  • 등록일
  • 페이지/형식
  • 구매가격
  • 적립금
자료 다운로드  네이버 로그인
소개글
조선시대 해양유민의 사회사 - 15~17세기 제주도민들의 유랑과 생존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조선시대 해양유민의 사회사
- 15~17세기 제주도민들의 유랑과 생존 -
이 책을 읽기 전, 나는 조선시대 해양유민에 대해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 다시 생각을 해보기로 했다. 아마 나는 단순히 이들을 그저 자신이 살고 있던 고향상황에 만족하지 못한 채 바다로 나간 사람들 이라는 생각만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어쩌면 이들은 책의 초장에서 언급했듯이, 교역 무대의 중심이며 역사 속 하나의 터닝포인트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나는 그동안 우리나라 역사에 관해선 왕권 중심의 역사, 혹은 큰 사건 중심의 역사, 농경 역사 위주로 학습을 하였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 책은 다르다. 변방의 역사, 해양중심의 역사, 귀족들이 아닌 서민들이 해양유민이 된 이유와 함께 그들이 역사 속에서 일궈낸 업적들에 대해 고찰했다. 그렇기에 나는 새로운 시각에서 시작하는 우리 제주도민 출신의 해양유민의 역사를 알게 될 생각에, 그리고 왜 이책은 15세기부터 17세기까지의 해양유민에 초점을 맞추고있는지에 대한 궁금함에 이 책이 좀 더 흥미로워지기 시작했다.
책의 해양유민이 발생하게 된 배경을 이야기하는 부분이 있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그들이 출륙을 하게 된 계기는 수치과다와 세종 때부터 일어난 말교역 통제에 따른 제주 경제의 기반 붕괴라는 요인이다. 제주도민들은 이러한 요인에 맞서 집 안에 들어가 농사를 짓는 방식이 아닌 출륙을 통한 시대적 상황에 맞서 생계를 이어나갔다.
바다유민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물품이 교역 통제를 당한다는 것은, 요즘 시대에서 스마트폰 없이 살아가라는 것이다. 그만큼 이들의 생계에 대해서 조정은 무책임했다. 하지만, 그들은 바다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이었고, 또다시 살아남기 위해 바다로 나아갔다.
생각해보면 제주도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하여 떠나는 사람들이 참 많았고 지금도 많다. 조선시대 해양유민들, 일제시대 돈을 벌기 위해 살아남기 위해 떠나간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현재마저도 제주도 내 어린 학생들은 제주도를 마치 바다라는 감옥에 둘러쌓인 곳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20살 이후 이 지역을 벗어나 서울로, 육지로, 해외로 나가려고 한다. 나도 그 예외는 아니다. 나도 벗어나고 싶었다. 살아남기 위해 자유롭기 위해 이곳을 떠나는 생각을 계속 하곤 했다. 반대로 나이가 들면 제주도로 돌아오려는 사람들. 혹은 노년의 안식과 안정된 삶을 위해 제주도로 오려는 사람이 많이 존재한다. 정말 씁쓸한 생각이 든다. 당시의 그들은 과연 출륙만이 답이었을까? 책의 한 부분에선 이러한 방법을 마치 부정적 상황에 맞선 도전이라며 바라보며, 제주의 경제구조가 농업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다면 유리걸식하거나 한라산 깊은 곳으로 숨어들어 관의 수취를 피하며 화전을 일구며 살았으리라 생각된다라고 말했다. 제주도는 말이 유명하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어쩌면 해양유민들을 말교역으로 인해 경제가 무너진 제주도를 외면하며 떠난 도망자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사면이 바다인 것은 무엇보다도 우수한 지형의 이점이다. 모든 과거는 역사적 상황에 따라 인과가 존재하지만, 그러했던 것이 옳은 것이거나 그럴 수밖에 없었다라는 변명으로써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정말 어쩌면, 당시의 사람들 그리고 지금의 사람들 또한 제주도의 이점을 놓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혹시 아는가? 제주도가 교역중심이 아닌 농업중심인 혹은 그 다른 중심 과거위에 세워졌다면 지금 시대가 어떻게 바뀌었을지 말이다.
나는 이 책을 통해, 우리 해양유민들을 일본 학자들이 왜구와 동일하다라고 주장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정말 대다수의 일본학자들은 뭐든지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는 습관이 있는 것 같다. 제주 유민이 때로는 약탈을 자행했기 때문에 정부에서 수적으로 의심하기도 했다. 그러나 수적은 좀 더 조직적으로 약탈을 일삼던 전문적인 집단이며, 제주유민은 우발적이고 일회적인 즉 비조직적인 단순 약탈자로서 수적과는 조금 달랐다. 물론 이들 중 일부가 수적에 편입되기도 했을 것이며 점차 수적으로 발전하기도 했을 것이다. 또한 왜구와 수적, 제주 유민들은 바다유랑을 하는 삶의 환경이 비슷했기에 서로 상당한 교류를 진행하고 있었다. 때로는 협력하고 때로는 갈등하던 관계인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점이 우리 유민과 왜구와 수적이 동일한 분류는 아니다. 바다생활이라는 생태적 공통점이 그들을 연결 시킬뿐 일체화시키지는 않기 때문이다. 일본학자들과 달리 당시의 조선 정부에서는 이들을 분명하게 구분시키고 있었다. 정말 다시 생각해봐도 일본학자들은 엉터리 논리로 자기 것이라고 하는 데에는 도가 튼 것 같다.
이 책을 읽으며 한 가지 더 놀란 사실이 있다. 작년 여름에 나는 최민식 주연의 ‘명량’ 이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다. 이 영화는 임진왜란 당시의 이순신 장군의 명량 대첩을 배경으로 한 영화이다. 영화 안에서 이순신은 모든 장군들이 사기를 잃고 있는 와중에 곧 해전이 일어날 지역주민들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당시 다른 장군들은 그의 이러한 행동을 전혀 해전에 도움이 없는 필요없는 행위라고 생각했다. 참 사람이 간사한게 자신의 아래에 있는 사람들의 말은 잘 들으려 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순신은 달랐다. 해전을 위해 많은 정보를 수집했고, 그 지역주민들이 말해준 정보로 명량 해전에서 13척만으로 10배인 133척의 왜군과 싸워 이긴 것이다. 이런 이순신의 많은 해전은 이순신 혼자만 일궈낸 것은 아니었다. 해양유민들 또한 이런 해전에 가담하여 많은 업적을 이룬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의 해양유민들은 이 왜란에서의 역할이 매우 컸다. 이들이 가진 물길 정보, 배 다루는 능력 때문에 이들은 일찌감치 수군의 주목을 받았다. 그것은 곧바로 임진왜란이 터지자 효력을 발휘했다. 이들의 업적은 이순신의 기록에 그 활동상이 적지 않게 드러난다. 여러 전투에서의 사망, 부상자 현황을 보면 이들 제주유민의 비율이 10%가 넘었다. 그만큼 전쟁에서 맡았던 역할이 컸다.
반면 이들은 왜병으로 편입되기도 했다. 조선 관료의 수탈이 심할 때 이들은 왜병의 일원이 되기도 했다. 이들에게 중요했던 건 근대의 민족의식이 아니라 생존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이들의 배인 포작선도 전투에 동원되었다. 소규모 배로써 아주 빠른 장점이 있었기에 대형 전투선인 판옥선의 보조 역할을 담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