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의자X의 행복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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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의자X의 행복을 찾아서
작품 감상)
1980년도 기네스북에 한국인 청년 한 명의 이름이 등재되었다. 그의 이름은 김웅용이었다. IQ 210이라는 경이로운 수치로 기네스북에 이름을 올린 그는 우리나라 국민 모두의 시선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했다. 누구나 부러워할만한 ‘천재’가 우리나라에서 탄생한 것이다. 그는 누군가에게는 영웅이었으며, 삶의 지표가 되었으며 때로는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되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중년의 신사가 된 지금 그는 이렇게 말한다. 모두가 부러워할 만한 모든 것을 가졌을 때보다 꿈을 위해 평범하게 살아가고 있는 지금을 더 행복하다고 말이다.
나는‘용의자 X의 헌신’에 등장하는 이시가미를 통해 진정한 행복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이시가미의 천재적인 두뇌나 범행을 숨기기 위한 철저하고 계산적인 모습보다 그의 은둔적이고 외로운 생활에 더 눈길이 갔다. 모두의 부러움을 사기에 충분한 수학천재 ‘이시가미’는 물리학에서 권위적인 명성을 떨치고 있는 ‘유카와’에게도 유일하게 인정받는 수재이다. 영화초반 천재적인 두뇌를 가진 이시가미와 유카와는 나에게도 동경과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시험을 보거나 공부를 할 때면 언제나 ‘내 머리가 조금만 더 똑똑했으면....... 내가 천재였다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생각하기 마련인데 천재들의 명석한 머리는 무엇보다 강한 무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화 막바지에 이러한 부러움은 두려움으로 바뀌었다. 천재적인 머리를 살인에 이용하게 된 이시가미는 분명 살인이 아니라 ‘사랑’을 꿈꾸었을 것이다. 그것이 사랑하는 사람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나는 이 점이 매우 안타까웠다. 수학에 있어서는 누구보다 천재적인 그가 정작 사랑의 방법에는 미숙했던 것이다. 당연히 천재라고해서 모든 것을 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천재소년으로 불리었던 김웅용씨도 미국으로 건너가 문화의 차이와 인종차별 때문에 대인관계에 심한 장애를 겪었다고 말했다. 만약 아인슈타인이 살아 돌아와서 피겨스케이팅의 원리를 아무리 과학적이고 논리적으로 증명한다고 하더라도 김연아처럼 스케이트를 탈 수는 없지 않은가. 이시가미는 어쩌면 자신이 부족한 부분을 채워줄 야스코를 동경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언제나 환한 미소로 사람들을 대해주는 그녀. 자신의 딸과 사랑스러운 농담을 주고받고 작은 생명의 소중함과 나눔을 아는 그녀의 모습이 이시가미에게는 너무도 멀게만 느껴졌을 것이다. 어쩌면 그가 집착한 ‘4색정리’에 의해 그와 붙어있는 이웃집의 야스코는 다른 색으로 정리되어 버린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학창시절 누군가가 한 번 더 그에게 관심을 가져주었다면, 그리고 이웃 누군가가 한번이라도 더 그의 집 문을 두드려주었다면 적어도 작은 호의에 열렬히 불타오른 이시가미의 마음이 살인으로 변질되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 같다. 언제나 같은 시간에 같은 도시락을 사고 회사에서 식사를 하는 그는 회사동료나 다른 이웃들과는 말 한마디 나누지 않는 것 마저 한결같았다. 그의 주위에는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 누구도 그를 천재라고 치켜세워주거나 동경하지도 않는다. 그런 그에게 야스코의 미소는 너무도 절대적인 행복이었을 것이다.
일본사회에서 은둔형 외톨이의 증가가 몇 해 전부터 이슈로 부각되고 있다. 영화를 보며 각자 가진 천재성이 좋은 곳에서 빛을 발하고 부족한 점이 더 나은 방향으로 발전하기 위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서로의 이야기를 듣고 관심을 기울이는 소통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 혼자서 산 정상에 올라 누구보다 높은 곳에 섰을 때 과연 진정한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것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하는 영화였다.
용의자X의 헌신을 통해 만나 본 일본영화)
우리나라에서는 좀처럼 만나보기 어려운 분야인 범죄나 추리 분야가 일본에서는 엄청난 발전을 이루었다. 일본인 특유의 장인정신과 섬세함이 일찍이 그들의 글에도 반영된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어린 시절 ‘투니버스’라는 채널을 틀면 항상 재미있는 만화영화가 쉬지않고 방영되었다. 그 중에서도 ‘명탐정 코난’이라는 애니메이션을 즐겨보았던 기억이 난다. 범인의 얼굴이 무서워 이불 속에 몸을 숨기고 떨면서 보면서도 그 긴장감에 매 회 빼놓지 않고 ‘코난’이 방영되는 시간만을 기다렸다. 매 번 다른 장소와 다른 인물 다른 사건들이 펼쳐지는 것은 어린 나에게 신비함 그 자체였다. 일본 작품이 가진 소재의 다양성은 그 때부터 나에게 다가왔던 것 같다. 최근 우리나라 드라마가 일본의 드라마를 원작으로 하는 경우가 많은 것은 우리나라의 드라마가 가진 한계와 식상함을 탈피하고자 하는 노력에서 나온 것 같다. 그러나 단순히 소재를 늘린다고 해서 신선하고 이목을 끄는 소위 ‘성공한’ 작품을 만들 수 있는 것은 분명 아니다. 용의자 X의 헌신에서도 보이듯이 일본작품에는 치밀하고 섬세한 상업적 계산이 들어가 있다. 그 치밀함은 대사와 인물에서도 엿보인다. ‘헬로키티’라는 범지구적 사랑을 받는 캐릭터를 탄생시켰을 정도로 캐릭터상품의 상업화에 탁월한 일본은 영화나 드라마 하나하나에도 인상에 남는 캐릭터와 대사를 부여하여 대중들에게 각인시키고자 하는 것 같다. ‘용의자 X의 헌신’만 보더라도 ‘아무도 풀지 못하는 문제를 만드는 것과 그 문제를 푸는 것 중에 어느 것이 더 어려울까?’ 라던가 ‘그 문제를 풀어도 아무도 행복해지지 않아.’와 같은 대사들은 듣는 이의 뇌리를 스치고 가슴 깊이 인상을 남기게 된다. 영화를 보고 다른 것은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이 대사만은 기억에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