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감상문 화폐전쟁2 서평 - 화폐전쟁2 줄거리 - 화폐전쟁2 감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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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화폐전쟁2
1권에 이어 2권에서도 국제은행가문의 역사에서부터 책이 시작되고 있다. 1권에서는 로스차일드가문에 초점이 맞춰졌다면 2권에서는 독일, 영국, 프랑스, 미국의 금융가문과 로스차일드가문과의 관계에 대해 서술하였다. 산업혁명 이후 이 가문들이 어떻게 금융을 이용해 성장하였고 이것이 역사와 전쟁의 흐름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먼저 독일금융가문으로는 비스마르크의 심복이자 베를린의 은행가인 블라이흐뢰더 가, 쾰른의 오펜하임 가, 함부르크의 바르부르크 가, 베를린의 최고 전통을 자랑하는 멘델스존 가가 손꼽힌다. 특히 블라이흐뢰더 가는 로스차일드 가의 대리인을 자청해 그들의 네트워크의 편입되면서 크게 성장하였다. 특히 비스마르크가 수상으로 재임하던 시절 그의 은행계좌를 관리해주면서 전쟁에 따른 채권사업으로 큰 수익을 거두었다. 전쟁을 시작할 때는 전비 마련을 위한 채권발행으로 돈을 벌고 전쟁이 끝난 후에는 배상금 지불에 관한 채권발행으로 많은 돈을 벌었다. 이처럼 금융가문들은 정치계 직·간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이에 따른 콩고물을 많이 챙겼다.
영국금융가문으로는 베어링과 로스차일드, 슈뢰더 가가 있다. 가장 먼저 금융가문을 창시한 베어링가의 역사는 로스차일드 가와 비교하면 훨씬 장대하다. 가장 먼저 사업을 일으켜 영향력이 막강했고 글로벌 은행 네트워크 모델을 창시했다. 이러한 베어링 가는 암스테르담을 거점으로 성장한 호프 가와 합작을 하면서 세력을 확대해 나가게 된다. 베어링 가는 루이지애나 구매안과 영미전쟁, 프랑스 전후 배상의 금융 사업을 독식하면서 금융계에서 독보적 위상을 차지하게 된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로스차일드 가문과 사이가 안 좋아 지면서 두 가문은 대립하게 된다. 로스차일드 가의 뛰어난 수단과 주도면밀한 계획으로 결국 베어링 가문을 무릎 꿇게 만들고 사실상 유럽의 패주로 자리 잡게 되었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영국이 대규모로 자본을 수출할 수 있었던 것은 전 세계 화폐 시스템의 발전에 절대적인 도움을 받았기 때문이다. 1870년대 세계 화폐 시스템은 금은 양본위 체제에서 금본위 체제로 완전히 전환되었고 영국 파운드가 세계 기축통화로 자리매김했다. 이러한 발전에 큰 역할을 한 것이 바로 로스차일드 가문이다. 영국이 수많은 식민지를 건설하면서 해가지지 않는 나라를 만들었고 이 과정에서 로스차일드 가문은 금융지원을 통해 엄청난 부를 축적하게 된 것이다.
프랑스는 영국에 비해 산업혁명이 두 세대나 늦었고 프랑스 대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으로 인해 경제에 막대한 타격을 입었다. 하지만 인도차이나와 북미, 아프리카 등에 막대한 해외 식민지 자원을 바탕으로 금융이 발달하게 되었다. 프랑스 금융자본의 발달은 민영 은행업에서 출발하였다. 하지만 후에 주식제 은행이 출현하면서 둘 사이에 전에 없던 격렬한 경쟁이 벌어지게 되었다. 프랑스 은행 가문은 크게 두 그룹으로 나누어지는데 하나는 청교도 은행 가문으로 대표적으로 미라보, 말레, 호팅거 가 등이 있다. 이들은 프랑스 대혁명을 막후에서 적극 지원하였고 혁명이 자신들의 통제에서 벗어나자 다시 나폴레옹의 정권 장악을 도와 프랑스의 금융 시스템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나폴레옹의 독재 스타일이 은행 가문들의 이익과 배치되자 부르봉 왕정 복구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된다. 이처럼 은행 가문들은 자신들의 이익에 따라 정치적으로 압력을 가하면서 성장하게 된다. 다른 금융 세력으로는 유대계 은행 가문이 있는데 주요가문으로 로스차일드, 풀드, 스턴, 웜스 가 등이 있다. 이중에서 로스차일드 가를 핵심으로 하는 민영 은행 시스템과 페레르, 풀드를 대표로 한 프랑스 크레디 모빌리에라는 새로운 주식제 은행 모델의 경쟁이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경쟁에서도 결국 로스차일드 가문이 승리하면서 영향력을 확대해 간다.
미국의 금융역사는 백지상태부터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종교박해를 피해 유럽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건국한 미국은 어마어마한 땅덩어리에 풍부한 천연자원과 거의 없다시피 한 인프라로 인해 자본의 수요가 무한대에 가까웠다. 게다가 이곳에는 봉건 계급 제도나 종교 박해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국제 은행 가문에게는 그야말로 천혜의 옥토가 따로 없었다. 이러한 미국에는 국제 은행 가문들이 대거 속출하게 되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주목받는 그룹은 단연 유대계 가문이었다. 대표적인 유대계 은행 가문으로는 셀리그먼, 벨몬트, 시프, 쿤, 룁, 바르부르크, 슈파이어, 리먼, 골드만, 삭스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러한 은행 가문들은 막후에서 엄청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고 있다. 여기서 저자는 미국 대통령들의 암살 뒤에는 항상 국제 은행 가문들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는 국가 분열은 기본이고 혁명, 전쟁까지 일으킬 정도로 무소불위의 능력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 예로 파나마 독립을 들었는데 파나마운하건설을 위해 콜롬비아를 압박해 파나마를 독립시킨 것이 바로 국제 은행 가문이라는 것이다.
국제 은행 가문 중에는 상당수가 유대인 출신이었다. 이러한 유대인 중에는 시오니즘을 바탕으로 유대인의 국가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들이 있었다. 대표적인 가문이 로스차일드, 바르부르크 가이다. 이들은 팔레스타인 지역에 이스라엘을 건국하기 위해 그동안 축적해온 금권을 이용하였다. 우선 시온주의자들은 독일과 오스만 제국을 설득해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대거 이주할 수 있는 통행권을 얻어내었다. 하지만 시온주의자들의 궁극적 목표인 유대국가 건설에는 두 국가가 모두 반대하였다. 이에 실망한 시온주의자들은 독일의 라이벌인 영국을 이용하기로 마음먹었다. 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영국은 독일을 물리치고 오스만 제국을 분할한 후 오스만 제국 경재의 아랍인들과 협상을 벌여 아랍 지역의 독립을 보장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팔레스타인의 유대 민족 국가를 세우는데 찬성한다는 ‘밸푸어 선언’을 발표하였다. 연합군이 제 1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하자 시온주의자들은 드디어 이스라엘 재건국 이라는 희망을 가졌다. 하지만 전쟁에서 승리한 후 영국은 팔레스타인을 영국의 식민지로 만들어 버렸다. 당시 영국인들은 아랍인들의 반발을 우려해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이민은 장려하되 국가 건설은 불허한다는 방침이었다. 이에 시온주의자들은 이스라엘을 재건하기위해 제 1차 세계대전 때 외부의 힘을 빌려 오스만 제국을 무너뜨린 것처럼 다시 외부의 손을 빌려 중동에서 완강한 태도를 보이고 있는 영국을 물리쳐야 했다. 여기서 다시 이용한 국가가 바로 독일이었다. 당시 독일은 제 1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으로 경제적으로 피폐한 상황이었다. 당시 독일을 통차하고 있던 정부는 바이마르 공화국이었는데 이 정부는 영국을 압박해 중동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허약하였다. 따라서 시온주의자들은 무능한 바이마르 공화국을 뒤엎어버리고 강력한 독일을 건설하기로 마음먹었다. 먼저 독일의 화폐를 겨냥해 화폐투기를 하여 마르크화 폭락과 하이퍼 인플레이션을 발생시켰다. 이로 인해 바이마르 공화국의 경제는 완전히 무너졌고 국민들의 인내심도 한계를 넘어섰다. 여기서 국제 은행 가문들이 밀어준 세력이 바로 ‘나치’ 히틀러이다. 당시 국제 은행 가문들은 히틀러를 통제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결과는 그러지 못했다. 결국 히틀러가 독일에 집권하면서 시온주의들의 생각과는 다른 방향으로 일이 흘러가고 말았다.
나치 독일은 제 2차 세계대전에서 막강한 군사력과 첨단 군사 장비를 선보여 전 세계를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이러한 저력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은 경제적인 뒷받침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히틀러가 막 정권을 장악했을 당시 독일의 경제상황은 참담하였다. 모든 제조업 생산은 40%나 떨어져 있었고 실업률은 30%를 육박하였다. 이러한 산업 위기는 금융위기로 이어져 많은 은행들이 도산하고 황금보유량도 급감하였다. 이에 나치는 집권과 동시에 경제 회복을 최우선 해결 과제로 삼고 이른바 ‘뉴딜 정책’을 실시했다. 일련의 강력한 경제 조치를 실시한 결과, 경제는 빠른 속도로 침체 국면을 벗어나 성장 단계에 들어섰다. 그들은 우선 중앙은행을 국유화 시키면서 국제 은행 가문의 영향력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메포 어음’을 발행해 자본이 경제발전에 필요한 생산재 제조에 투입될 수 있도록 하였다. ‘메포 어음’은 국제 은행가문이 쳐놓은 통제의 사슬을 벗어나 독일 정부가 스스로 자국 ‘화폐’를 발행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이 ‘메포 어음’으로 인해 구매력이 향상되고 이는 고용 창출로 이어졌다. 결과적으로 주택과 고속도로가 건설되고 실업률이 1.3%미만으로 떨어지면서 독일 경제 발전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미국 역시 1933년부터 ‘루스벨트의 뉴딜 정책’을 실시했지만 경기 침체를 잠시 완화 하는 역할만 했을 뿐. 1941년에 발발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이후에야 비로소 경기불황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다. 독일은 경제 대공황으로 인한 경제 타격을 가장 크게 입은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가장 먼저 대공황에서 벗어나 글로벌 금융위기가 다시 덮친 오늘날 우리에서 시사 하는바가 크다.
히틀러에 의해 무산된 이스라엘 건국계획은 복잡한 국제관계를 이용한 첩보활동으로 결국 완성되었다. 로스차일드 가의 인맥과 재력으로 영국의 정보기관에 스파이로 침투하여 많은 국가 기밀들을 소련으로 빼돌렸다. 특히 당시에 가장 강력한 정보 자산이라고 할 수 있는 핵무기에 관한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러한 정보들을 미끼로 시오니즘 세력들은 소련에게 이스라엘 건국에 대한 지지를 요구하였다. 그 전까지 소련은 일관되게 이스라엘 건국을 반대해 왔다. 소련의 정치적 이념은 시오니즘에 대해 항상 부정적인 입장이었다. 이런 소련은 1947년부터 갑자기 이스라엘 문제에 대한 태도가 180도로 돌변하였다. 1948년 5월 15일 이스라엘이 건국을 선포하자 소련은 즉시 독립국으로 인정한다는 입장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1949년에는 미국과 함께 이스라엘의 유엔 가입을 지지했다. 미소 양대 강국이 동시에 이스라엘의 건국을 지원한 것은 극히 이례적인 사건으로 이 배후에는 시오니즘 세력이 있었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