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 게바라 20세기 최후의 게릴라 u 게바라 20세기 최후의 게릴라 줄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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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체 게바라 - 20세기 최후의 게릴라
나는 ‘체 게바라’ -20세기 최후의 게릴라 라는 책을 읽게 되었다.
체 게바라. 그동안 체 게바라 하면 떠오르는 게 쿠바혁명, 사회주의 혁명가 라는게 전부였고, 자신의 신념을 위해 수많은 사람들의 피를 흘리게 만든 사람이라는 생각만 들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체 게바라에 대한 나의 인식이 확 뒤바뀌게 되었다.
그의 철학을 접하지 않은 이는 게릴라 대장이란 단순히 호기심을 자극하는 인물이라 평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다르다. 그가 만약 전쟁광, 단순한 게릴라 대장이었다면 오늘의 체 게바라는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어울리지 않을 듯한 단어인 전쟁과 낭만, 폭력과 철학, 무엇보다 그는 불가능한 꿈을 지닌 리얼리스트였다.
1장 - 에르네스티로에서 체로
에르네스토 게바라 데 라 세르나는 1928년 6월 14일 아르헨티나의 로사리오 데 라 페의 유복한 프티부르주아지 가정에서 건축가 아버지와 프랑스 문학에 심취한 교양 있는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가 두 살이 되던 1930년 5월의 어느 아침, 찬물로 목욕을 한 것이 그만 폐렴으로 번져 평생 동안 그와 그 주변 사람들에게 무거운 짐이 되고 말았다. 부모의 정성에도 불구하고 그의 천식은 지독히도 끈질겼다. 연이은 발작에 그는 점점 더 쇠약해져만 갔는데 운명을 거스르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아이는 이런저런 운동에 집요하게 매달리기 시작하였다. 그때까지 제방에서 책에 파묻혀 있던 허약한 꼬마가 단단한 육체를 가진, 건강한 아이가 되더니 이내 자연을 마음껏 호흡하며 인근 인디오 소년들의 놀이에도 거리낌 없이 끼어들었고 그가 아홉 살 되던 해부터 사회적 불평등에 눈을 뜨고, 그러한 현실에 괴로워하기 시작하였다. 완벽한 스포츠인 이 된 소년 에르네스토는 이미 열렬한 독서광이었으며, 열렬한 독서 벽은 평생을 변하지 않았다. 열일곱 살에는 볼테르에게 영감을 받아 철학서를 뒤적거리게 되고, 바로 이 무렵, 평생을 같이할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1947년, 의사가 되겠다고 작정하고 그 다음해 여름에는 자전거에 모터를 조립해 달고, 친구를 만나러 수도에서 850km 정도 떨어진 곳으로 훗날에 돌아보면, 전주처럼 울려 퍼질 그 생애의 첫 번째 여행을 하였다. 23세의 그는 절친한 친구 알베르토 그라나도와 1만km에 이르는 라틴 아메리카를 7개월 동안 여행하려는 야심찬 계획을 세워 1951년 12월 29일, 드디어 포데로사Ⅱ(불굴의 여인)를 타고 여행을 시작한다. 라틴아메리카의 극단을 향한 이 여행은 훗날 커다란 상징으로 남게 된다. 1952년 3월 그들은 추키카마에 있는 브레이든 컴퍼니의 구리광산을 찾는데 그곳에서 산산 조각난 인생들을 목격하고 그는 미래를 정치에 걸기로 결심하였다. 이 여행은 단순히 한 젊은이의 낭만적인 경험을 넘어서는 것으로 중남미인의 척박하면서도 숨겨진 역사와 삶을 경험하게 함으로써 훗날 그를 혁명가의 길로 이끄는 바탕이 된다. 이 여행은 그가 평탄한 삶이 보장된 조건을 벗어나 이후 역사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보이지 않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고국으로 돌아와 단숨에 의학 공부를 마친 그는 새로운 여행을 떠난다. 이번여행은 첫 번째 여행과는 의미가 달랐다. 착취의 정치적 조건을 학습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고 행동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과테말라에서 미래의 아내가 될 여자를 만나게 되는데 칠레여자, 힐다 가데아가 그이이다. 총명한 웅변가요 아프라(Apra, 아메리카 혁명을 위한 동맹) 당원이며 혁명의 열기를 발산하는 힐다는 에르네스토를 단숨에 사로잡는다. 그가 첫 만남부터 그녀의 열정과 명석함에 포로사 되었다면, 그녀는 오히려 회의적이었는데 그이유는 퐁명한 사람이기에는 너무 잘생겼다는 것이었다. 멕시코에서 그는 에르네스토 엘 체 게바라로 불리게 되는데 글을 시작할 때나 끝낼 때면 언제나 아르헨티나 식으로 감탄사 체를 수식으로 붙이곤 한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2장 - 혁명 제1막
1955년 7월 둘째 주의 어느 날 저녁, 22시경, 그는 멕시코에 있는 엠파란가 49번지에서 피델 카스트로를 만난다. 그날 밤 내내 ‘양키’라는 적들에게 착취당하고 있는 남아메리카대륙에 대한 토론이 계속되었고 여명이 밝을 때, 피델이 에츠네스토에게 압제자 바티스타로부터 쿠바를 해방시킬 대장정에 참여하자고 제안한다. 반바티스타 운동의 탄생을 예고하는 것은 1953년 7월26일에 행해진 산티아고 테 쿠바의 몬카다 요새 습격이다. 피텔은 이미 10개월 전부터 이를 위해 훈련된 병력을 요새 습격에 투입했고 이작전은 완전히 실패하였다. 특공대의 절반이상이 살해되고 피델과 라울은 현장에서 생포되었다. 그러나 피텔은 그를 석방하라는 여론에 바티스타 정권에서 몬카다 요새 습격자들을 위한 특별사면법을 재정하여 피텔은 핀스섬에서 2년 동안 자신의 정치-사회적 지식을 확충하고서는 풀려났다. 체는 산타로사라는 외딴 농장에서 특공대 훈련을 하였고 바티스타는 쿠바 해안을 완전히 봉쇄할 수 있게 되자 에르네스토는 착취와 빈곤을 추방시키기 위해 떠났다. 같은 해 11월말, 전사들이 그랜마호에 올랐고 M26-7은 상륙을 대비해 보급기지들을 여러 개 만들어 놓았다. 상륙작전으로 그들은 21명 전사가 생포되었고 나머지는 농민들에게 의존하면서 그들은 4만 명에 이르는 정부군에게 선제공격을 가했다. 1957년 1월 투르키노산 인근의 플라타 기지를 공격하고 저항군은 아로요델인피에르노에 두 번째 공격을 한다. 바티스타에 대항하는 것은 M26-7만이 아니었으며 인민 사회당, 13인의 지도부, 혁명 본부등 이들은 곳곳에서 혁명이 일어났다. 지휘자가 된 체는 서부를 책임지고 헤페는 투르키노를 관장하고 이 둘은 피노델아과를 공격하고 9월 17일 승리하였다. 이들은 이상향을 향해 조금씩 혁명의 길로 걸어가고 있었고 피텔의 정치 목적이 점점 구체화 될수록 체의 열정은 혁명으로 기울로 있었으며 체는 모든 것을 바쳤다. 체는 자신의 의도를 아는 간부들과 병사들을 길르는 것을 원했으며 그는 게릴라전은 인민 전체가 압제자를 상대로 수행하는 말하고 이의 모태는 인민이며 인민은 게릴라전의 핵심이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피텔은 엘옴브리토 정상에 최초의 게릴라 교육대를 설립한다. 저항군들은 다양한 대중들을 끌어들이고 심지어는 여자들까지 지원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그들은 바티스타는 털북숭이 말썽꾼을 소탕하기로 했다. 5월 초, 대규모 정규군이 토벌에 나섰고 체는 리오후이바코아 지역에 투입해 정부군은 패배에 패배를 거듭하였고 바티스타 충성파 지휘자들은 심리적 공황에 시달렸다. 이들은 많은 승리를 거두었고 그럴때마다 그들이 진군과 함께 혁명의 대의가 대중 속에 점점 파고들었다.
본토 상륙을 감행한지 25개월, 드디어 쿠바는 해방되었다. 그의 나이 30세 그는 젊은 나이로 승리자가 되었지만 훨씬 복잡한 시대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더 나은 삶을 위해 새로운 삶의 방식을 만들고 전파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