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감] 한국근현대사, 한국 근대민중 생활사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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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근현대사, 한국 근대민중 생활사읽기
20세기 근대로의 전환은 공간적 측면에서 많은 변화가 있었다. 1876년 강화도 조약으로 개항장 주위의 항구나 포구가 새로운 사회, 경제의 중심 권역으로 부각되었다. 이러한 근대적 공간이 갖는 대표적인 지역 가운데 하나가 바로 영산강을 수계로 한 목포와 나주이다.
목포와 나주는 영산강의 강구를 통해 접근이 용이한 지역이었다. 한반도의 6대 강 가운데 하나인 영산강의 강줄기는 광주와 나주를 거쳐 목포 바다로 흘러든다. 고려 창건당시 왕건이 나주 호족을 중심으로 견훤세력을 견제할 수 있었던 것은 영산강과 그 배후에 발달한 농경지로 인한 물적 토대가 뒷받침되었기에 가능하였다. 그러므로 영산강을 끼고 발달한 서해 항로는 현재의 서해안고속도로와 같은 역할을 담당했다고 할 수 있다.
목포는 1897년 개항과 더불어 근대 도시로 성장한 대표적인 도시 가운데 하나다. 목포가 역사에 등장한 것은 조선 세종 때 만호진이 설치되면서부터였다. 하지만 목포가 주목받게 된 경정적 계기는 1897년 개항장이 되면서 이다. 개항으로 각국 조계지가 설치되면서 목포에는 일본을 비롯해 러시아, 미국, 프랑스, 청, 영국 등 제국주의 국가들이 밀려 들어왔다.
미국인 선교사들은 개항과 더불어 목포에 들어와 기독교의 확산을 꾀하였다. 그들은 포교를 위해 교육사업과 근대적 병원의 건립에 주력하였다. 배유지를 비롯한 미국인 선교사들은 양동에 양동교회와 영흥학교, 정명여학교, 그리고 근대적 병원인 제중의원을 세웠다. 이들 미션계 학교에서 근대적 교육을 받은 학생들은 3.1운동의 확산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한편, 조선중부는 조선인들이 거주하던 쌍교동에 일본을 비롯한 외국과의 통상외교와 조선인들의 치안 및 행정을 담당하는 무안감리서를 설치하였다. 그러나 개항 8년 만에 을사조약이 체결되면서 목포에 설치된 무안감리서도 폐지되었다.
일본인들과 조선인 지주들은 목포가 상업과 무역의 중심지로 부상되자 미곡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하면서 목포에 자리를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