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사] - 보고서 - 사회학도들의 제주 역사 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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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사회사
- 사회학도들의 제주 역사 기행을 다녀오고
답사. 백문이불여일견이라는 말이 있듯이 강의를 통해 역사적 사실을 배우고 듣는 것보다도 어떻게 본다면 답사는 역사적 지역과 문화재를 직접 보고 접하면서 그에 대한 느낌을 가지고 역사적 사실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지식을 습득할 수 있게 한다고 생각한다. 이번 답사의 주요 장소는 관덕정, 항몽유적지, 모충사, 곤흘동, 제주항일운동기념관, 해녀박물관으로 나는 답사지와 그에 관한 느낀 점들을 역사의 서술체계와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 지배층의 의도가 역사에 가지는 영향, 그 외 답사지에 대한 나의 종합적인 의견. 이렇게 크게 3가지로 나누어 적고자 한다.
과거부터 우리가 배워온 역사는 중앙중심적 서술체계를 가지고 있어서 제주의 역사가 차지하는 비중이 작을뿐더러 제주인의 시각에서 역사가 서술된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 하지만 역사는 이제까지 우리가 배워온 것처럼 역사가의 주관적인 해석이므로 역사를 당시 지역 사람들의 시각으로 재해석 한다면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타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항파두리성·항몽유적지에서 교수님께서 갑작스러운 삼별초의 입도가 제주민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졌을까?, 한국사에서 삼별초는 몽고라는 외세의 침입에 대해 마지막까지 항쟁한 인물들이지만 당시 제주민도 그렇게 생각했을까? 라는 질문을 하셨다. 굳이 내 생각을 적자면 삼별초는 고려 무신정권의 기반이 되었던 군사집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군사집단이 토성 증축과 식량에 대해 자급자족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 생각하고 이는 그대로 당시 제주인의 부담이 되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또한 그 이전에도 무신정권 시기는 당시 집권층의 경제적 수탈이 극심했던 시기로 알고 있다. 만약 그렇다면 제주인들에겐 삼별초는 몽고의 투쟁한 자주적인 이들보다는 자신들의 지역에 들어와 자신들을 수탈하고 착취하는 군사집단이라고 여겼을 것이라 생각한다. 무엇보다 아쉬운 점은 몽고의 제주인의 수탈이 이루어졌는지에 관한 제주인의 시각으로 된 자료가 없다는 것이다. 만약 있었다면 삼별초에 대한 다른 시각을 바라볼 수 있었을 것이다. 일제강점기 역시 마찬가지다. 이제까지 배운 역사들을 보면 기존의 중앙정부 관리들의 비리와 수탈은 언제나 존재했으며 이는 서민들의 고통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제주도는 약 500년간 중앙정부의 억압을 받아왔으며 자신들이 채취하고 생산한 생산물은 자신들의 소유물이라 보기도 힘들었다. 그에 비해 일제 강점기는 적어도 제주인의 생산물을 대가를 지불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일제시대를 옹호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시각에서 역사를 본다면 몽고나 일본과 같은 외세의 유입이 당시 제주인들에게 있어서 과거 중앙정부의 수탈보다는 낫지 않았나 싶다.
역사는 과거의 경험으로써 현재에 지표가 되는 역할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역사를 서술하는 사람의 의도는 그 때의 사람뿐 아니라 현재의 사람들에게 까지 영향을 미친다. 초기의 곤흘동 표지판에는 이곳 사람들이 어떻게 죽었는지에 관해 적지 않았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과거 4.3사건이 일어났을 당시 우리나라 군인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점을 감추면서 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하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또한 시대가 바뀐 이후 다시 표지판을 교체하였다. 이 역시 과거와는 다르게 현재의 시대상이 민주화가 확립된 이후, 인권이 상승하고 4.3사건에 대한 비판이 높아지면서 이를 반영하였을 것이라 생각한다. 모충사도 마찬가지다. 모충사는 1977년에 설립되었으며 건립문에는 총력안보제주도협의회에 의해 건립되었다고 적혀 있다. 이는 박정희 정권 즉, 당시 유신체제의 산물이다. 순국지사 조봉호 기념비, 제주의병항쟁 기념탑 그리고 제주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김만덕의 묘를 통한 선조의 충절과 겨레를 본받자는 건립 의도는 당시 정권이 제주민들에게 호응을 얻기 위함임을 알 수 있다. 제주항일기념관·기념탑, 제주해녀박물관·해녀항쟁기념탑 역시 항일이라고 하는 민족의식의 고취를 통해 국가에 대한 충성심을 만드는 의도가 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즉, 지배층의 정권유지나 국가에 대한 충성심을 고취시키기 위해 역사를 이용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답사지에 대한 내 의견을 말한다면, 솔직히 이해 할 수 없는 전시물이 있었다. 예로 항몽유적지에 조선시대 백자 조각이 왜 전시되어 있는 건지, 모충사 만덕관에 인두, 혼례복, 향로 등이 어째서 전시 되어 있는 건지 이해 할 수 없었다. 만약 이것을 전시 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다면 그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또한 별도봉 일본군 진지의 경우에도 들어갈 수 없고 그에 관한 어떠한 표지판과 설명도 없다는 점에서 과거 일제시대에는 진지로 사용되었고 4.3사건 당시에는 학살지가 되었던 역사를 단순한 굴로 여길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해녀박물관도 마찬가지다. 바로 옆에 해녀항쟁기념탑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박물관은 이름 그대로 해녀의 삶을 표현하는데 중점을 두고 있었다. 관덕정·제주목관아의 경우, 교수님께서 관덕정 밑에서 탐라 혹은 고려시대의 건물 터가 발견됐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에 복원 되었으며 복원조차도 중앙정부에 의해 중앙의 방식으로 복원되었다고 말씀해주셨는데 어째서 제주의 역사를 가진 관광지로써 제주의 특색을 살리지 않은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또한 지하에 있는 그 중요한 역사적 자료들을 보존한 채로 복원시킬 수는 없었던 건지 의문이다.
이번 답사가 나에게는 다소 힘들기도 하였지만 그만큼 더 많은 지식을 얻을 수 있었다는 건 분명하다. 그 예로 나는 제주의 항일운동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고 조천만세운동의 주체가 조천김씨라는 사실도 이곳에 와서야 알았고 삼별초에 관한 새로운 시각도 가질 수 있었다. 다만 내가 제주의 역사에 관해 잘 몰랐던 것처럼 제주의 역사는 쉽게 접할 수 없다는게 아쉬울 뿐이다. 과거 내가 역사에 관해 배울 때는 제주는 삼국시대의 탐라, 고려시대의 삼별초 항쟁지, 조선시대의 유배지로 밖에 인식하지 못했고 그 이상은 배우지도 못했던 것 같다. 하지만 제주는 독특한 문화와 유적지를 가지고 있다. 이는 분명 연구해 나가야 할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