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침략과 중국 사회의 변화 중국 장기지속 총력전 중국 공산당 항전 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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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일본의 침략과 중국 사회의 변화 중국 장기지속 총력전 중국 공산당 항전 중국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일본의 침략과 중국 사회의 변화
目 次
Ⅰ 머리말
Ⅱ 장기지속의 총력전
Ⅲ 국민당의 항전과 사회적 변화
Ⅳ 공산당의 항전과 사회적 변화
Ⅴ 내전과 공산당에 의한 국가 통합
Ⅵ 맺음말
Ⅰ 머리말
1931년 9월 만주사변(滿洲事變)을 일으켜 이미 대륙 침략의 발판을 마련한 일본은 자신들의 제국주의적 야욕을 위해 금주(錦州)열하성(熱河省)을 침공한데 이어 화북에까지 세력을 확장해 나가다가 마침내 1937년 전면적으로 중국 관내로 쳐들어갔다. 이후 일본의 군사침략확대는 중국국내의 국공간의 내전을 잠시 적이나마 완화시키고 한편에서는 국민정부 하에 독립과 통일을 기치로 하는 내셔널리즘을 고양시켜 제2차 국공합작을 중심으로 하는 항일민족통일전선 형성의 직접적 요인이 되었다. 중일전쟁이 태평양 전쟁으로 확대되면서 중국의 항일민족 통일전선은 국제적인 反파시즘 투쟁의 중요한 일익을 담당하는 것이 되어 중국 운명은 바로 세계 자유와 민주진영의 운명과 하나가 되었다. 항일전쟁 중 중국에서의 두 주류 중국국민당과 중국공산당은 각각 독자적 성격과 역량을 형성하고 있었으나 모두 국제정치의 조류를 이용하면서도 매우 민족주의적 성격이 농후한 독자성을 강조하여 왔던 것이 후에 양당의 운명을 가르게 된다.
여기에서는 항일전쟁 중 국민당과 공산당의 항전 형태와 국민당의 항일 근거지인 대후방과 공산당의 근거지인 변구(邊區)의 사회적 변화에 대하여 알아보고 공산당에 의한 국가 통합이 어떻게 이루어져 갔는지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한다.
Ⅱ 장기지속의 총력전
당시 일본과 중국은 상당한 국력 차이가 있었다. 일본은 징병제에 의한 국민개병 시스템의 확립으로 상당히 짧은 시간에 1백만이 넘는 병사를 중국 대륙으로 동원하였다. 한편 중국은 모병제를 근간으로 전쟁이 시작될 무렵 전국에서 200만여 명의 육군이 있었으나 실제 동원 가능한 병력은 80여만 명에 불과했다. 장비에 있어서도 중국 최정예 부대가 갖추고 있는 화기는 일본의 절반 이하의 수준이었다. 군함은 중국 6만톤, 일본 200만톤이었고, 비행기는 중국 305대, 일본 2,700대였다.
경제력 측면에서 또한 중국과 일본의 격차는 현격하였다. 제강업에서 중국 선철조강의 생산량은 각각 96만톤과 56만톤이었다. 그중 일본이 지배하는 동북 지역이 각각 81만톤과 52만톤을 차지하였다. 게다가 일본 국내의 생산량은 각각 191만톤과 470만톤이었다. 일본이 전력은 8배, 수산화나트륨은 31배였다.
더욱 심각한 것은 당시의 중국 공업 배치에서 현저한 편차가 있었다는 점이다. 특히 근대 공업은 대부분 연해 지역에 있었고 따라서 일본이 쉽게 침공하여 접수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 지역에 구축되었던 항전 능력이라는 것도 역으로 쉽게 적의 전력을 보강하는 것이 되었다. 전쟁에서 일본은 압도적으로 유리했다. 그래서 일본은 속전속결을 지향하였다. 이에 대해 중국은 국민당과 공산당 모두 전략적으로 광활한 국토를 이용하여 공간을 양보하고 시간을 버는 장기적인 지구전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항일전의 장래에 대한 전망과 전략에 있어서 장개석은 이미 35년 여름에 ‘전국의 힘을 모아 지구적 소모전에 종사하여 최후의 승리를 획득한다’는 것으로 ‘결전시기를 지연하는’ 방침을 세웠다고 말한다. 모택동도 또 지구전에 의해 최후의 승리를 할 수 있다고 서술하고 있다. 전쟁의 전망에 있어서는 거의 일치함에도 전략이 다르고 동시에 전술적으로도 장개석이 진지 방어전을, 모택동이 유격전과 운동전을 주장했던 것은 민중동원이라는 점에 생각이 달랐던 것이다. 《中國近現代史》, 일월서각, 1985, p.320~1
일반적으로 중일전쟁은 크게 세 시기로 나눈다. 일반적으로 일본에서는 918사변(1931), 77사변(1937), 일본의 대영미 선전포고(1941)를 계기로 삼아 여러 견해가 있다. 반면 중국에서는 대체로 ‘8년전쟁’이라 하여 77사변부터 1945년 8월까지로 보고 있다. 《강좌중국사 Ⅶ》, 지식산업사, 2006, p.197
제1기는 노구교사건이 발발한 1937년 7월 7일부터 무한(武漢)광주(廣州)가 점차로 함락되었던 1938년 10월말까지이다. 이 시기에 북경천진상해남경광주무한서주 등 주요도시가 모두 함락됐다. 국민정부는 남경(南京)에서 무한으로, 다시 중경(重慶)으로 수도를 옮기고 오지로 물러서서 항전을 계속했다. 일본은 파죽지세로 진격하였지만 보급선이 늘어져 소모가 불가피하게 되고, 그 간격을 뚫고 게릴라전과 항일 근거지가 성장해갔다. 제2기는 일본이 말레이시아를 침공하고 거의 동시에 하와이의 진주만을 공격함에 따라 중일전쟁이 아시아 태평양 전쟁으로 확대된 1941년 12월 8일까지이다. 국민정부는 사천성(四川省)을 중심으로 하는 대후방을 근거로 하여 본격적인 자력 항전 체제를 구축하였다. 공산당은 팔로군이 화북을, 신사군이 화중을 중심으로 한 주요 유격전을 펼쳤다. 제3기는 일본이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하여 중일전쟁을 종결한 1945년 8월 15일까지이다. 백단대전(百團大戰) 국민당의 대일항전 의욕 결여, 국내의 패배주의 , 반공선전을 타파하기 위해 중국공산당이 100개단 이상의 팔로군 40만을 동원하여 1940년 8월부터 약 5개월간 일본군에 정면으로 도전한 전투이다. 이 전투로 인해 일본군은 비로소 중공군의 실력을 인식하게 되었다. 《20세기 중국사》, 돌베게, 1995, p.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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