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안 관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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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양안관계사
1. 공산당의 발전
1차 국공합작이 결렬된 후 공산당은 무장으로 국민당에 항거하며 독립적인 농촌 토지혁명을 이끌어 나간다는 방침아래 주덕(朱德) 등 공산당 휘하의 군대를 동원하여 1927년 8월 1일 남창에서 폭동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들은 국민당이 파견한 군대의 포위로 사흘만에 남창에서 물러났다. 남창폭동이 실패한 후 긴급회의를 열고 초대 서기장인 진독수와 그의 지도하에 있던 당 중앙의 노선을 우경기회주의라고 규탄하고 국민당에 대한 무장 항거와 토지혁명을 수행한다는 새로운 방침을 세웠다. 모택동이 지도한 호남에서의 폭동을 비롯하여 호북, 하남, 섬서, 광동 등지에서 폭동이 일어났으나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1927년 12월 광주(廣州)에서의 실패로 돌아간 도시폭동을 마지막으로 도시와 농촌에서의 폭동은 끝이 나고 살아남은 공산당원들은 농촌지역으로 들어가 근거지를 확보하기로 하였다. 그렇게 하여 형성된 가장 대표적인 근거지가 모택동과 주덕의 정강산(井崗山)근거지였다. 먼저 모택동이 군대 안에 공산당지부를 두어 전군을 당의 전적(前敵)위원회가 통일적으로 지휘하게끔 부대를 개편한 후 정강산에 들어가 군의 기율을 엄정하게 정하여 현지민들과의 마찰을 최소화하면서 근거지를 확보하였다. 이어 남창폭동에서 패한 주덕의 부대가 합류하였다. 모택동과 주덕은 코민테른의 지시에 따라 자신들의 부대를 홍군(紅軍) 제4군이라 명명하였다. 정강산 근거지는 국민정부군의 공격을 이겨내고 더욱 확고해지자 토지혁 명을 시행하였다. 한편 국민정부군의 추격을 받은 공산당은 1928년 모스크바에서 제6차 전체대표대회를 열었다. 여기서 구추백의 노선은 좌경 맹동(盲動)주의라 하여 엄격한 비판을 받았다. 이 대회에서 노동자 출신인 향충발(向忠發)이 정치국 주석으로 최고 지도자가 되었으나 실제로는 이입삼(李立三)이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이입삼은 1930년 들어 공황의 여파와 반장전쟁으로 혁명적인 정세가 조성되었다고 보고 농촌으로 도시를 포위하며 도시 안에서의 노동자의 총파업에 편승하여 도시를 점거하기 위한 무장투쟁을 지시하였다. 그러나 잠시 장사(長沙)를 점령했다가 퇴각한 외에는 각 도시 에서의 총파업과 무장폭동은 큰 손실을 남긴 채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공산당은 회의를 열어 이입삼노선의 착오를 비판하고 홍군의 도시공격을 중지하기로 하였다. 이후 당은 왕 명(王明) 등 28인의 볼셰비키라고 불리운 젊은 소련 유학생들의 지도하에 들어갔다. 한편 그 동안에도 근거지는 꾸준히 늘어나서 중앙혁명근거지를 비롯하여 각지에 소비에트 지역이 늘어났다. 1930년대에 공산당은 13개성에 걸쳐 15개에 달하는 근거지를 확보하였다. 이들 소비에트의 대표들은 1931년 11월에 중화소비에트 제1차 전국대표대회를 소집하여 [헌법대강], [노동법], [토지법] 등에 관한 중요한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그리고 강서성 서금(瑞金)을 수도로 하는 임시중앙정부의 성립을 선포하였다. 모택동이 중앙집행위원 회에서 주석으로, 주덕은 혁명군사위원회 주석으로 선출되어 정치, 군사적인 측면에서의 모(毛), 주(朱)체제가 성립되었다. 이제 중국 안에 남경국민정부를 부정하는 또 하나의 정부가 수립된 것이었다. 당연히 국민정부는 공산당 토벌작전을 더욱 강화하게 되었다.
2. 국민당의 포위공격과 대장정(大長征)
국민정부가 공산당 근거지에 대한 포위공격에 나선 것은 반장전쟁이 진행 중이던 1930년 여름과 가을에 이입삼노선에 따라 공산당이 대도시를 공격하는 움직임을 보인 것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공산당의 세력이 점점 커져가고 있는 것을 깨달은 국민정부는 반장전쟁이 마무리되자 12월부터 다음해 1월에 걸쳐 10만 명이라는 군을 동원하여 공산당 근거지에 대한 포위공격을 시도하였다(제1차 포위공격). 그러나 홍군은 국민정부군을 소비에트 지역 깊숙히 끌어들이고 유격전을 펴서 정예부대가 아닌 그들을 격파하였다. 1차에서 실패한 국민정부군은 곧이어 1931년 봄에 20만에 가까운 병력을 동원하여 제2 차 포위공격 작전을 개시하였다. 홍군은 국민당의 각 부대간에 긴밀한 협조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던 상황을 이용하여 약한 부대를 집중공격하는 방식으로 역시 이를 격파하였다. 두 차례의 실패로 경각심을 가지게 된 국민정부군은 장개석의 진두지휘하에 정예부대 10만 명을 동원하여 1931년 여름에 제3차 포위공격을 개시하였다. 이번에는 홍군이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는데 결정적인 순간에 만주에서 일본군이 침략전쟁을 일으킨 사건(만주사변) 때문에 장개석이 일단 포위작전을 중지함으로써 위기를 넘겼다. 국민정부군의 포위공격이 중지된 틈에 소비에트 지역에서는 임시중앙정부가 수립되고 홍군이 적극 세력을 키워나갔다. 국민정부군은 일본과 정전협정을 맺고 대외적인 위기가 소강상태로 들어가자 국내를 안정시킨 뒤 외국의 침략을 막아낸다는 안내양외(安內攘外)정책을 고수하여 1932년부터 1933년에 걸쳐 제4차 포위공격을 하였다. 그러나 장개석이 중앙소비에트 지역으로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을 때 다시 일본이 열하지방을 침공하게 되자 국민정부군은 군대를 그 쪽으로 이동해야 되었기 때문에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끝이 났다. 이어 1933년부터 1934년에 걸쳐 제5차 포위공격이 이루어졌는데 이번에는 중앙소비에트 지역을 둘러싸고 철조망, 방벽 등으로 연결된 요새를 건설하는 진지전을 폈다. 이는 소비에트 지역에 대한 경제봉쇄까지 가능케 하였으므로 이 지역은 상당한 영향을 받게 되었다. 공산당은 국민당의 포위 준비기간에 세워 놓았던 전략적 이동준비를 실행에 옮겨 뒷날 장정이라 불리게 된 탈주를 시작하였다. 서금의 근거지를 포기하고 1934년 10월부터 1935 년 11월까지 일년 여에 걸친 장정의 어려움을 겪은 끝에 살아남은 홍군은 섬서성에 도달하였다. 장정 도중 홍군이 귀주성 준의(遵義)에 도착했을 때 공산당은 정치국 확대회의를 열고 5차 포위공격에 대한 대응에서의 실패에 대하여 검토하였다. 그리하여 군사적 실패의 책임을 당 지도부에 돌리고 당 지도부가 새로이 개편되었다. 그 때까지 당 지도부를 지배해온 왕명 등 소련유학생들이 지도권을 상실하고 모택동이 정치국 위원이자 중앙 군사위원회 주석으로 당의 지도권을 장악하였다. 이후 모택동은 중국공산당의 유일한 지도자로서의 지위를 끝까지 고수하였다. 밖으로 일본의 침략이 격화되어 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장개석은 여전히 안내양외정책을 고집하여 섬서성으로 밀려난 공산당 근거지를 근절하겠다는 제6차 포위공격을 준비하였다(1936). 그러나 당시 공산당은 이미 내전을 정지하고 공동으로 항일을 하자는 주장을 하고 있었으므로 광범위한 지식인, 학생층은 장개석의 내전에 대하여 반대하는 분위기였다. 결국 6차 포위공격은 도중에 일어난 서안사건으로 국민당과 공산당의 합작과 항일전쟁으로 이어졌으므로 역시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중도에서 끝났다.
3. 일본의 침략
① 일제의 중국 침략 강화
일본은 1931년 9월 18일 만주사변(滿州事變) 당시 동북과 만주방위를 맡던 장학량(張學良)은 국민정부의 무저항방침에 따라 관동군과의 정면충돌을 피하고 국민정부는 국제연맹에 사건을 제소하였다. 그러나 제네바의 국제연맹은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며 일본과의 타협을 권유하였다.
을 일으키고 군사적인 완전한 승리를 거둔 후 ‘동아의 신질서 건설’이란 명분하에 1932년 3월 1일 괴뢰정권인 만주국(滿洲國) 일본은 외국으로부터의 비난을 피하기 위해 만주를 ‘독립국’으로 해 놓을 필요를 느끼고 옛 청조의 최후황제였던 부의(溥儀)를 내세워 그를 집정(執政)으로 한 만주국이 세워졌다.
을 건설하였다. ). 마침 제3차 공산당 포위공격을 지휘하고 있던 장개석은 만주의 실질적 지배자였던 장학량에게 휘하 동북군이 일본에 저항하지 말고 철수하도록 하여 부저항정책을 취하였다. 장개석이 부저항정책을 택한 것은 잔여군벌의 지방할거와 반장개석파의 국민당 원로들, 무엇보다도 공산당의 소비에트 지역 등의 존재로 자신의 권력기반이 취약하였으므로 국제 연맹에의 제소와 같은 외교적 수단을 통한 평화적인 해결책을 원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국제연맹을 통한 외교적 노력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여론의 비판이 거세 지자 잠시 공직에서 물러났다가 왕정위와 타협하여 복직하였다. ‘9.18’ 발발 후 중국국민은 국제연맹서양열강 및 남경정부의 소극적인 태도 장개석은 ‘밖을 물리침에는 반드시 먼저 안을 안정시켜야 한다.’는 안내양외(安內攘外)론을 내세워 일본침략에 대한 전면저항을 할 수 없다는 무저항정책을 정당화했다.
에 대해 격렬하게 분개하며 각지에서 파업, 청원데모, 반일집회, 일본상품 보이콧과 군사적 항전 등의 반일항일 운동을 전개하게 된다.
일본 관동군은 ‘만주국’의 지배를 굳히기 위해 화북침략을 확대하는 정책을 펴게 된다. 32년 7월 열하 작전이 개시되고 중국 본토의 동북부지역까지 그 지배영역을 확대하게 된다. 국민당 정부는 평화를 희망했고 일본측도 목적이 어느 정도 달성되었다 보고 양자 사이에 당고(塘沽)에서 정전협정이 맺어졌다(32년 5월 31일). 이로 인해 일본은 만주 내에서의 지위를 강화하고 각종 군사적경제적 이권을 얻게된다.
② 중일 전쟁의 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