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 문화 융합 사상의 기원 위원 사상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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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동서 문화 융합 사상의 기원 위원 사상을 중심으로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동서 문화 융합 사상의 기원
- 위원(魏源) 사상을 중심으로
위원의 생애
시대적 배경
위원의 사상
- 위원의 실용주의
- 위원의 발전사관
- 선험론, 선지후행론 비판
- 위원의 평등사상
- 서구 문화의 수용
맺음말
위원의 생애
위원(1794~1857)의 자는 묵심(深)이며, 원래의 이름은 원달(遠達)이다. 호남의 소양(邵陽) 사람으로 지주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가경제(嘉慶帝) 말년에 유봉록(劉逢祿)에게서 공양학을 배워 후에 공자진(自珍)과 나란히 이름을 떨쳐 당대 사람들은 이들을 ‘공위(魏)’라고 불렀다. 그는 1822년 과거에 합격, 1825~1826년에 하장령(賀長齡)을 대신해서 『황조경세문편(皇朝經世文編)』을 편집하였으며 그 후로 하장령과 양강(兩江)의 총독 도주(陶澍), 임칙서(林則徐) 등을 위해서 조운(漕運), 수리(水利), 염정(鹽政)을 계획하고, 『주조편(籌漕編)』 등 경제문제에 관한 문장을 저술하였다. 1829년 그는 내각에 소장된 풍부한 서적을 열람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아편전쟁 발발 후, 그는 양강 총독 유겸(劉謙)의 막부에 들어가 절강전선의 항영(抗英)투쟁에 참여하였다. 또한 『괴무기(怪武記)』를 제작하여, 이 책으로 청나라 통치자로 하여금 무기준비를 진흥하여 외래 침략을 억제하도록 격려하고자 하였다. 한편 임칙서의 부탁을 받고 임칙서 주편역의 『사주지(四洲志)』의 기초 위에서 중국 근대를 제1부로 하는 세계역사, 지리를 소개한 저서 『해국도지(海國圖志)』를 편찬하였다. 이 책은 출판된 후 중국 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어 중국의 개량파에 대해서 계몽적 작용을 하였을 뿐 아니라, 일본에까지 전해져 일본 유신운동에 일정한 영향을 미쳤다. 1845년 진사가 된 후, 위원은 강소(江蘇), 동태(東台), 흥화(興化), 고우(高) 등지에서 관직을 맡았다. 1853년, 태평군이 강소지구로 진출하자, 위원은 고우에서 단련(團練)을 창립하여 완강히 저항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문보(文報)가 지연됨으로써 면직되었다. 1857년 그는 항주(杭州)에서 병으로 죽었다. 그의 저작은 위의 것 이외에도 『고미당집(古微堂集)』, 『원사신편(元史新編)』, 『노자본의(老子本義)』, 『시고미(詩古微)』, 『서고미(書古微)』 등 다수가 있다. 侯外盧, 『중국근현대철학사』 양재윤 역 p.35
시대적 배경
중국은 전통적으로 중국이 세계의 중심에 존재하며 타민족, 타국가는 문화적, 도덕적으로 열등한 오랑캐라는 화이관(華夷觀)을 중심으로 하는 세계관인 중화(中華)사상을 고수하고 있었다. 사실 중국은 18세기 이전까지는 세계적으로 군사적, 경제적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중화사상은 단순한 세계관의 차원에서 넘어서 동아시아의 정치질서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것은 조공(租貢)체제라는 동아시아의 독특한 국제관계를 형성했고, 이 질서 속에서 중국과 동아시아는 일정한 관계를 유지해오고 있었다. 다시 말하자면 화이관에 입각한 중화사상은 동아시아의 세계관이었을 뿐 아니라 정치질서로서 존재했던 것이다.
그러나 18세기 이후 산업혁명과 신대륙으로부터 획득한 은을 통해 성장한 유럽은 곧 중국의 경제적 위치를 압박하기 시작했으며, 1842년 청조가 영국과의 아편전쟁에서 패배하고 남경조약을 체결하면서 군사적으로도 일방적으로 중국을 압도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오랫동안 중국과 동아시아의 세계관이자 정치철학이며 국제질서로 존재하던 중화사상과 화이관은 큰 위협을 받게 된 것이다.
서구의 도래와 충격을 통해 일어나게 된 화이관과 중화사상에 대한 회의는 동아시아의 사상계에 전통에 대한 회의와 성찰을 요구하였다. 청과 조선, 에도(江戶)막부로 대표되는 당시 동아시아 국가들은 사상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유학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었고, 그중에서도 청과 조선은 정주학(程朱學)을 중심으로 이학(理學)의 영향 하에 있었다. 그러나 전통적인 사회체제 내에서 역할하던 이들 유학사상은 위와 같은 동아시아의 총체적인 불안과 함께 흔들리기 시작한다. 공자와 맹자의 사상과 요순(堯舜)의 정치가 최고의 방법이라고 생각하던 동아시아의 사상가들에게 강력한 군사력을 앞세운 근대적 서구의 충격은 그들의 세계관과 가치관에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한 것이다. 이러한 변화의 시대에 사회적 요구에 응답한 이가 바로 위원이라고 하겠다.
위원의 사상
위원이 주목받는 이유는 본격적으로 서구의 사상을 수용하려고 노력하기 시작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위원 이전까지는 전통적인 중화사상 속에서 서구를 오랑캐라 하여 멸시하였으며 이해하려는 노력이 부족했을 뿐 아니라 그들과의 접촉에서도 경제적인 이익이나 새로운 문물을 접하는 수준에서 그쳤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아편전쟁과 함께 서구가 충격으로 다가오면서 위원과 같은 전통적인 사상가들에게도 새로운 시각이 요구되었다. 청조의 부패와 무능, 서구의 압력을 벗어나기 위한 부국강병책을 모색하기 시작하였고 그 방법론 중 하나로서 서구를 배우자는 목소리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위원의 실용주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