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날조 변조 표절 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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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과학 글쓰기 날조, 변조, 표절 사례
■ 날조 사례
사례 ① : 후지무라 신이치- 구석기 유물 조작 사건
△일본 구석기 유물 날조 사건 보도(2000.11.5)
2000년 11월 5일 일본 마이니치신문 1면 머릿기사는 전 일본인들을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저명한 고고학자 후지무라 신이치(藤村新一)가 미야기현 가미다카모리 유적에서 구석기 유물을 조작한 기사와 함께 석기를 몰래 땅에 파묻는 사진이 보도된 것이다. 가미다카모리는 일본의 선사시대 역사를 70만년 전 전기 구석기 시대로 끌어올린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주거지 유적으로 평가받았으나 속임수였음이 드러났다.
고교 졸업 후 독학으로 고고학을 공부해 유적 발굴에 나섰던 후지무라는 1981년 미야기현 자자라기 유적에서 4만년 전 석기를 발굴하면서 명성을 얻었다. 이후 그의 손길이 닿는 곳마다 구석기 유물들이 출토되어 신의 손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그의 발굴로 일본 역사의 기원은 5만~7만년 전에서 무려 70만년 전까지 가파르게 올라갔다. 그의 성과는 고교 교과서에 실렸으며 유적지는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그렇지만 그의 발굴에는 미심쩍은 부분이 많았다. 남이 안 보는 데서 혼자 작업할 때 유물이 나왔고, 30㎞ 떨어진 곳에서 발견된 석기의 아귀가 정확히 들어맞았으며, 석재가 주변의 암석과 다른 점 등…. 역사적·문화적 우월성에 경도된 일본 고고학계는 이런 의혹을 애써 무시했고, 20여년 동안 유물 조작을 방기했다. 그 사이 후지무라는 162곳의 구석기 유적을 날조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일본 학계는 구석기 역사를 전면 수정해야 했다.
"주변의 기대와 주문에 따른 압박감으로 조작 행위를 벌였다"는 후지무라의 고백. 지나친 성과에 집착해 학자의 양심을 저버린 사기 행각의 저변에는 자랑스러운 역사에 과잉 집착하는 사회 분위기가 깔려 있었다.
사례 ② : 필트다운 맨 사건
‘잃어버린 고리’(Missing Link) 즉 원숭이와 사람의 중간 형태의 화석인류로서 학계로부터 관심을 모았던 이른바 ‘필트다운인’(Piltdown Man)이 최고의 과학사기 사건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인류기원을 둘러싼 완전범죄에 가까운 이 과학사기 사건의 출발은 191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해 12월18일 오후 8시 영국 런던의 벌링턴 하우스. 지질학회가 열렸던 그 날, 런던 남부 서식스 지방의 변호사이자 아마추어 지질학자인 찰스 도슨(Charles Dawson)은 필트다운 마을 근처에서 새로운 화석인류를 발견했다고 포문을 열었다. 이 소식을 접하고 가장 먼저 공동탐사에 들어간 대영박물관 지질학 분야 관리자였던 아서 스미스 우드워드(Arthur Smith Woodward)는 이 화석인류가 인류의 직접적 조상으로 여기는 네안데르탈인에 버금갈 만큼 오래됐고 그보다 인류에 가까운 직계조상이라고 서둘러 확정했다.
그는 이 화석의 발견자 이름을 따서 ‘에오안트로푸스 도스니’(Eoanthropus Dawsoni)라는 그럴듯한 학명까지 지어주었다. 인간의 가장 오래된 조상이 에오안트로푸스 도스니로서 인류 기원의 도표가 바뀌게 된 것이다. 여기에 열광한 사람들은 당연히 인류 기원을 연구하는 학자일 것으로 생각하겠지만 그보다는 영국인이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인류 조상이 바로 ‘최초의 영국인’이라는 이 발견에 영국인들은 인류학적 위대함까지 느꼈다는 것이 당시 학자들의 전언이다. 그동안 크로마뇽인이나 네안데르탈인 등 인류의 계보에 등장하는 화석들은 대륙에서 발견됐다. 따라서 상대적 박탈감에 영국인들은 주눅이 들었던 것이다. 이런 분위 속에서 필트다운인은 영국의 대영박물관에 찬란히 모셔져 40년 동안 영광을 누렸다. 그러나 프랑스와 미국 쪽에서 끊임없이 의혹이 제기됐다. 수백 편에 달하는 논문이 쏟아지면서 논란은 끊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트다운인에 대한 진위를 의심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참과 거짓이란 명제의 논란 속에서 필트다운인의 영광은 1953년 드디어 막을 내리게 됐다. 그 해 대영박물관 연구원이었던 케네스 오클리(Kenneth Oakley)와 옥스퍼드대 생리학자 조셉 시드니 위너(Joseph Sydney Weiner)가 불소를 이용한 새로운 연대측정법으로 그동안 끊임없이 문제가 돼온 필트다운인에 대한 연대를 정확히 측정한 것이다. 그 결과 필트다운인은 완전히 사기임이 드러났다. 두개골은 극히 최근에 죽은 사람의 뼈였고 턱뼈 또한 죽은 오랑우탄의 것으로 드러났다. 연구팀을 더욱 놀라게 한 것은 턱뼈의 양끝부분이 해부학적 모순을 숨기기 위해 의도적으로 절단됐다는 점이다. 게다가 사람의 턱뼈라는 확신을 주었던 마모된 어금니는 인위적으로 줄질된 것이었음이 확인됐다. 그리고 필트다운인의 모든 뼈가 오래된 화석처럼 보이게끔 하고자 중크롬산염으로 처리됐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웃지 못 할 사실은 또 있다. 필트다운인과 함께 발견된 10종의 동물화석 가운데 그동안 영국에서 발견된 것은 단 한 건도 없었다는 점이다. 당시 함께 발견된 하마의 어금니는 불행하게도 몰타에서 온 것이고, 코끼리의 이빨은 엉뚱하게도 튀니지에서 온 것이었다.
사례 ③ : 마크 스펙터 - 마르부르크 효과 재발견 사건
1981년 7월. 세계과학계는 미 코널대 대학원생 마크 스펙터의 논문에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가 실험을 통해 암세포에서 정상세포보다 포도당을 젖산으로 빠르게 전환시키는 효소를 발견했다고 발표했기 때문이다. 암의 원인을 규명하고 그 치료방법을 찾아낼 수 있는 획기적 연구 결과였다. 그러나 이후 누구도 이 실험을 재현하지 못했다. 사법 당국은 그의 학력과 경력은 가짜였으며 신시내티대에서 문학 석사, 문학사 학위를 받은 적이 없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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