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문학선독] 노계 박인로 - 생애와 문학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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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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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蘆노溪계 朴박仁인老로
- 生생涯애와 文문學학世세界계
차례
1. 노계의 생애
2. 노계시가의 특징
1. 蘆노溪계의 生생涯애
박인로(朴仁老, 1561-1642)의 자(字)는 덕옹(德翁), 호(號)는 노계(溪) 또는 무하옹(無河翁)이라 하며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중시조 진록(晉祿)의 10세손이며 승의부위(承議副尉) 석(碩)의 아들로 영천군 북안면 도천리에서 태어나 82해를 살았다. 출생으로부터 31세까지는 성장수확기였고 32세부터 50세까지는 임진왜란에 종군한 무부기(武夫期) 51세부터 82세까지는 안빈낙도(安貧樂道)를 실천궁행한 유자기(儒者期)였다.
노계의 성장과 수학 과정에 대한 기록은 별로 없으나 그의 행장에 “명달여신(明達如神)하여 가르치지 아니해도 자능통해(自能通解)했다.”는 기록으로 볼 때,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재능이 뛰어났음을 알 수 있다. 13세 때에 지었다는 한시 에는 권력층에 대한 비판과 농촌의 어려운 현실에 대한 인식이 잘 드러나 있다.
32세(1592) 되던 해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영천의 의병장 정세아(鄭世雅)의 별시위(別侍衛)가 되어 활약하였다. 38세 때에는 경상도 좌병사(左兵使) 성윤문(成允文)의 막하에 들어가 많은 공을 세웠으며 이 때 성윤문의 명에 의하여 를 지었다. 39세 때에는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수문장(守問將), 선전관(宣傳官)을 잠깐 지낸 뒤 조라포(助羅浦) 만호(萬戶)가 되어 전쟁으로 도탄에 빠진 민생들을 정성껏 무휼(撫恤)하고 선정을 베풀었다. 임무를 마치고 귀향하자 사졸(士卒)들이 그의 청렴결백하고 고고한 인품과 은덕에 감사하여 송덕비(頌德碑)를 세웠다.
의병활동과 미관말직을 마치고 고향에 돌아와 “남아(男兒)의 대사업은 문장임”를 깨닫고 공맹(孔孟)의 제서(諸書)와 주자의 부주(附注)에 잠심하여 침식을 잊으며 깊은 밤에는 묵상(想)으로 천고의 성현(聖賢)을 생각하였고 꿈속에서 주공(周公)을 만나 성(誠) 경(敬) 충(忠) 효(孝) 4자를 얻어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는 등 유학자로서의 자수(自修)에 진력하였다. 그리고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 한강(寒岡) 정구(鄭逑),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지산(芝山) 조호익(曺好益)과 같은 거유(巨儒)들과 교유하면서 성리학에 심취하였다.
51세 때에 용진(龍津)에 있는 사제(莎堤)로 한음(漢陰)을 찾아가 종유(從遊)하면서 그를 대신하여 을 지었고 를 지어 자기의 곤궁한 생활상을 노래하였다. 57세 때에는 한강이 동래 온천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대구 검단동 금호강변의 소유정(小有亭)에 들린 적이 있는데 이때 를 노래 불렀고 59세 때에는 한강이 울산 초정(椒井)으로 온욕(溫浴)갈 때, 따라가 시조 2수를 지었다. 69세 때에는 여헌을 따라 입암(立巖)에 노닐면서 시조 입암 29곡을 지었으며 여헌으로부터 “무하옹은 늙음을 모르고 발분망식(發憤忘食)하며 유학에 힘쓰는 동방의 인호(人豪)”라는 칭찬을 받기도 하였다. 이렇게 강호의 명망있는 유학자들을 찾아다니면서 도학에 정진하다가 70세 때에 용양위부호군(龍讓衛副護軍)으로 우로(優老)를 받았고 안찰사(按察使)로 내려온 상국 이명(李溟)이 노계를 ‘독행특립지사(獨行特立之士)’로 계(啓)를 올리자 인조(仁祖)는 군(郡)에 명하여 미육(米肉)을 내리고 그 자손을 도와주도록 하였다. 75세 때에는 영남 안찰사의 덕치를 찬양하는 를 지었고 76세 때에는 노계곡에 유거하면서 를 지었다.
이와 같이 노계는 임진왜란 때는 의병으로서 가정을 잊고 나라를 위해 신명을 바치다가 전쟁이 끝난 후에 고향으로 돌아와서 유학자들이 지향하는 충효와 안빈낙도를 몸소 실천하면서 은거구도적(隱居求道的)인 삶을 살았다. 가사 와 등 일부 한시에 가난으로 겪게 된 현실적 어려움과 갈등이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는 점으로 볼 때, 노계는 의식 지향적인 측면에서는 사대부에 속했으나 현실 생활적인 측면에서는 몸소 농사를 지을 수밖에 없었던 향반계층(鄕班階層)으로서 전쟁 후의 극심한 궁핍으로 인하여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다소의 심적 갈등을 일으킨 것 같다. 그러나 노계는 가난이라는 현실 문제를 유교적 이상인 안빈낙도 사상으로써 극복하고 자연을 안식처로 삼아 초탈한 삶을 영위하였다.
그는 67수의 시조와 9편의 가사를 나기고 있는데 시조는 와 같이 교훈적인 내용을 주로 관념적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가사는 고사성어(故事成語)와 한문 어구를 많이 사용하여 참신성이 다소 떨어지는 감이 없지 않으나 구체적인 경험을 일상어(日常語)를 사용하여 묘사함으로써 사실성을 띨 뿐만 아니라 작품 전체의 구상이 웅장하면서 문체가 질박(質朴)하고 유려(流麗)하기 때문에 정철(鄭澈), 윤선도(尹善道)와 함께 3대 시가 작자로 톺이 평가받고 있다.
『노계집(蘆溪集))』은 3권 2책으로 된 목판본이다. 학자에 따라서는 『노계집』의 판본(版本)이 3~4종이나 된다는 주장도 있으나 『노계집』판본은 1831년에 초간(初刊)이 이루어진 후에 중간(重刊)되거나 3간된 적이 없고 다만 3차에 걸쳐 추각(追刻) 및 보각(補刻)되어 추간(追刊)되었을 뿐이다. 이렇게 『노계집』은 추각되거나 보각하여 수차에 걸쳐 수시로 필요할 때마다 쇄(刷)를 달리하여 인간(印刊)하였기 때문에 3~4차 판을 새로 새겨 간행된 것으로 잘못 알려져 왔다. 『노계집』의 제 1차 추간은 1900년 이전에, 제 2차 추간은 1904년에, 제 3차 추간은 1960년에 이루어졌다. 제 1차 추간 때에는 권1 세계도(世系圖)와 권2의 속부(續附) 즉 제39~42장이 추각되었고 제2차 추간 때에도 권3 말미 즉 제33~42장에 가 추각되었는데 이 제 2차 추간본을 소위 광무본(광무본)이라 한다. 제 3차 추간은 노계의 11대 종손인 박수문(朴洙文) 씨가 1959년[己亥]에 추각을 시작했으나 일을 마치지 못하고 별세, 1960년[庚子] 여름에 이를 완료하여 영인, 반질한 것이다. 이 제 3차 추간은 가 노계의 작품이 아니라는 학설이 나오게 되었고 마침 1957년에 손균(孫均) 씨가 입암 29곡을 발굴하여 학계에 소개하였으며 1959년에는 시조 가 노계의 작품이라는 주장이 있었기 때문에 새로 발굴된 이들 작품을 추각하고 심히 마멸된 몇 곳을 보각하여 부분을 빼고 영인한 것이다.
국역 노계집, 김문기, 1999, 역락출판사
2. 老노溪계詩시歌가의 特특徵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