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문학선독] 함양박씨 족보 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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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국문학선독] 함양박씨 족보 탐구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함양박씨 족보 탐구)
1. 개국의성조 혁거세왕
2. 박혁거세 탄생신화
3. 본관의 유래 - 함양 박씨
4. 경명왕=>중시조=>육지파까지의 직계도
5. 항렬이란 무엇인가?
6. 항렬자의 생성법
7. 항렬표(함양 박씨-중랑장공파)
1. 개국의성조 혁거세왕
기원전 69년~서기4년, 신라의 건국시조이며 박씨의 시조로, 우리나라 박씨의 유일 시조이다. 재위는 기원전 57년~서기4년이다.
에 의하면, 혁거세는 경주 나정의 큰 알에서 태어나 이미 나이 10여세 때 매우 출중함을 보였고, 그 탄생 또한 신비하여 존경을 받다가 나이 13세 때인 기원전 57년에 당시 고조선의 유민들이 세운 진한 6촌의 촌장들로부터 왕으로 추대되어 신라의 시조왕이 되었다. 당시의 왕호는 거서간(居西干), 국호는 서라벌(徐那伐)이라고 하였다. 기원전 41년 왕은 비 알영과 함께 육부를 순행하며 농사를 장려하였다. 기원전 37년 서울에 성을 쌓아 금성이라 하였고, 기원전 32년 금성에 궁성을 지었다. 기원전 28년 낙랑이 침범해 왔으나 국경의 백성들이 밤에도 문을 잠그지 않고, 들에는 곡식더미가 즐비한 것을 보고 도덕의 나라라 부르며 스스로 물러갔다. 기원전 20년 마한의 왕이 공물을 보내지 않는다하여 노했는데, 이듬해 마한의 왕이 죽자 신하가 이를 큼타 마한을 치자고 하였으나 혁거세는 남의 불행을 이용하는 것은 어질지 못하다 하며 오히려 사신을 보내어 조문하였다. 기원전 5년 동옥저(東沃沮)에서 사신이 와서 말 20필을 바쳤다. 서기 4년 3월에 승하하여 담암사(曇巖寺) 북쪽에 장사 지냈다.
2. 박혁거세 탄생신화
기원전 69년 여섯 촌장들이 아들을 데리고 알천의 언덕 위에 모여서 백성을 다스릴 임금을 뽑기 위한 논의를 하던중 남쪽 방향의 양산 아래 있는 나정이라는 우물가에서 오색영롱한 빛이 비치고 백마 한마리가 무릎을 꿇고 절을 하는 모습이 보였다한다. 이들이 그곳에 가보니 박같은 알이 있어 이를 깨어 보니, 잘생긴 사내아기가 나왔다 한다. 사람들은 이러한 연유로 그아이를 혁거세라 이름 지었고, 박에서 태어났다 하여 성을 박씨라 하였다. 그가 곧 박씨의 시조인 박혁거세이다.
같은 날 사량리에 있는 알영정이라는 우물에서는 용이 나타났는데, 왼쪽 갈비에서 어린 여자 아이가 나왔다 한다. 이 아이는 얼굴과 입술은 고왔으나 입술이 닭의 부리를 닮아 보기가 흉해서, 월성 북쪽에 있는 냇물에 목욕을 시켰더니 부리가 떨어졌다. 사람들은 이 아이가 나온 우물의 이름을 따서 알영(閼英)이라 이름지었다.
기원전 57년 이 두 아이가 13세가 되자 박혁거세는 왕이 되었고, 알영을 왕비로 맞아들였으며, 나라의 이름을 서라벌이라고 했다. 이때부터 신라 왕실의 56대 왕은 박, 석(昔), 김의 3성이 돌아가며 하였는데, 그중 박씨 성을 가진 왕은 시조인 박혁거세를 포함하여 모두 10명이다.
박씨는 녀러 본관 중 단 1본도 외래 귀화족이 없으며, 모든 박씨는 박혁거세를 유일한 시조로 받들고 있다. 박씨끼리의 혼인을 피하는 이유도 이러한 까닭이다.
박씨는 박혁거세의 증손인 파사왕(신라 5대왕)과 일성왕(신라 7대왕)에서 갈라 졌으며, 일성왕계는 그의 26세손인 경명왕(신라 54대왕)과 경애왕(신라 55대왕)대에서 다시 갈라졌다.
특히 경명왕계는 아들 9형제에서...
첫째 아들 박언침의 밀성대군파 - 밀양박씨, 반남박씨, 진원박씨의 시조가 되었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