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던타임즈와 인간소외 -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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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모던타임즈와 인간소외 - 글쓰기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모던타임즈
수동적으로 하루 종일 나사를 조이는 사람이 있다. 이 사람은 회사 사장으로부터 어디서든 감시를 당하고 회사사장은 식사시간도 줄이기 위해 자동화된 식사 기계까지 도입하려한다. 결국 나사를 조이는 사람은 정신이상증세를 보여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조이기 시작하고 심지어 기계화가 되어버린 인간에게 기름을 뿌리는 행동까지 보인다. 이 이야기는 산업사회를 비판한 찰리채플린의 ‘모던타임즈’라는 영화의 일부이다.
산업사회에서 인간은 주체성을 잃어가고 회사의 요구에 수동적으로 살아가면서 자기 자신에 대한 개념을 잃어가고 있다. 인간이 만든 기계에 역으로 지배를 당하면서 인간의 일에 기계가 참여하는 건지 기계의 일에 인간이 참여하는 건지 구분이 모호해졌다. 이렇게 인간은 산업사회에서 도구화가 되어가고 자기 자신의 주인이 되어야 할 인간이 역으로 지배를 당하면서 자기 자신에 대한 소외를 느끼게 된다.
칼 마르크스에 따르면 산업사회에서 인간소외란 무의미, 허무감, 자시 자신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을 뜻한다. 그는 이 세상에 단 두 개의 계급밖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하나는 생산수단을 소유한 자본가이며 다른 하나는 노동력을 착취당하는 플로레타리아 이다. 산업사회에서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력으로 생산한 제품을 소유하지 못한다. 그들은 그 노동력으로 인해 발생한 가치의 최소치만 받는다. 그 이상의 잉여가치는 모두 자본가의 것이다. 결국 노동자는 자신이 만든 제품으로부터 또 그러한 제품을 제조하는 과정으로부터 소외된다. 그리고 노동자들은 자신이 받은 임금으로부터 자신의 존재가치를 발견하게 되는 모순이 일어난다.
‘모던타임즈’에서 찰리채플린은 이러한 소외의 모습을 잘 표현한다. 자신의 노동력을 획일화된 체제, 대량생산체제의 하나의 도구로서 활용하면서 점점 인간이 기계화가 되어간다. 영화 중간에 찰리채플린이 기계 속으로 빨려 들어가 인간이 톱니바퀴에 잘 어울려 돌아가는 모습은 인간의 기계화된 모습의 절정을 보여준다. 그 뒤로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조이는 도구’로 인식해버리는 전형적인 인간소외의 모습을 보여준다.
산업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영화 속 채플린은 교정의 장소인 경찰서에서 몇 번이고 투옥되었다가 나온다. 그리고는 또 산업사회에 내던져 지고 채플린은 또 일거리를 찾는다. 철저하게 본인의 본래성을 잃어버리고 사회구조에 끌려 다닌다. 그러던 채플린에게 한 소녀가 나타나는데 그녀와 채플린은 서로의 안타까운 처지에 동질감을 느끼고 함께 생활을 한다. 학벌, 집안, 외모, 능력 등의 조건으로 인연관계를 맺는 현대인들에 비해서 이들은 나름 순수한 만남을 가진다. 백화점에서 일을 하게 된 채플린은 그녀를 침구코너에서 비싸고 고급스러운 침대에 재운다. 소녀는 꿈만 같은 상황에서 단잠을 청하지만 아침에 일어나면 현실은 길거리로 나다녀야 하는 신세다. 산업사회에서 경제적으로는 큰 발전을 이루었지만 그에 대한 혜택은 이러한 사회구조에 철저히 적응하여 부를 증가시킨 사람의 몫이다.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 고급스러운 침대는 그저 꿈일 뿐이다.
영화를 보다보면 희극인인 찰리채플린이 이렇게까지 산업사회를 신랄하게 풍하자는 이유가 무엇일까 하는 생각이 든다. 100여년이 지난 지금 결국 자본주의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풍요를 얻게 된 것은 사실이고 따라서 이러한 사회발전은 올바른 길이었다고 할 순 없는 걸까? 영화 후반부에 채플린이 처음으로 육성을 공개하는 장면이 나온다. 식당에서 춤과 노래를 하는 일인데 손목에 적어놨던 가사가 사라져 즉흥적으로 노래를 하는 장면이다. 노래가사는 어느 나라의 언어도 아닌 무국적어다. 하지만 레스토랑에 있던 사람들은 그저 채플린의 행동이 웃겨 무의미한 가사임에도 불구하고 박장대소한다. 채플린이 이 장면을 연출하면서 겉으로는 경제발전을 이루었지만 속으로는 정체성을 잃은 현대인의 모습을 표현하려던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 현대인들도 ‘풍요’라는 껍질에 자신의 본래성이 포장되어 버린 것은 아닐까?
성공적으로 공연을 마치고 처음으로 산업사회에서 인정을 받은 채플린은 그녀와 함께 살아갈 희망이 보이는 듯 했지만 경찰이 와서 그녀를 가출청소년으로 데려가려고 한다. 또다시 도망자 신세가 되어버린 이들은 겨우 경찰을 따돌리고 다른 곳으로 떠난다. 쭉 뻗은 길에 태양이 비추고 그 아래 걸어가는 두 사람의 모습은 희망적인 미래를 암시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길게 늘어진 그림자처럼 끊이지 않는 추격에 의해 또 다른 도망자의 미래를 암시하기도 한다.
채플린은 산업사회에서 수차례 부적응으로 내쫓겨도 웃음을 잃지 않는다. 코미디라는 장르 때문일 수도 있지만, 어쩌면 이러한 사회구조 속에서 사람들이 자신이 소외되고 있다는 것을 느끼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표현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특유의 슬랩스틱 코미디로 사람들에게 웃음을 자아내지만, 외소한 체구로 영화 내내 쫓기는 모습은 왠지 모를 슬픔이 느껴진다. 하지만 채플린은 ‘웃음이야 말로 최고의 저항이다’라고 했다. 희극인의 정신으로 산업사회 속에서 인간 존재의 모순을 슬픈 코미디를 통해 풍자하는 그의 이야기야말로 당대 최고의 저항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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