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학 한국사 정묘 병자호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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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학 한국사 정묘 병자호란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전반에 걸쳐 동아시아의 정세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명과 조선이 임진왜란으로 말미암아 주변을 돌아볼 여력이 없을 때, 滿洲에서는 누르하치(奴兒赤; 1559~1626)가 여진족을 어울러 후금국을 건설함으로써, 명청 교체의 터전이 마련된 것이다.
누르하치는 성시를 수축하고 관제와 법률을 제정하였으며, 군사행정의 단위이고 국가통치조직인 八旗制度를 완성한 다음, 만력 44년(광해군 8년; 1616)에 「後金」을 세우고 연호를 天命이라 하였다. 당시 후금의 경제적 기반은 매우 빈약하였다. 그리하여 건국 직후 조선과 우호적 국교를 맺고자 하였고, 요동지방의 비옥한 농토가 필요해 명으로도 진출하고자 하였지만, 명은 여진족의 진입을 허락하지 않아 무력침공을 단행하였다. 천명 3년 4월「七大恨」(七宗惱恨)을 구실로 요동지방을 침입하고 撫順과 淸河를 차례로 함락시켰다.
이로 인해 명의 조정은 곧바로 회의를 열고 누르하치를 정벌하기로 결의한다. 이로써 조선과 명후금의 3국 관계는 복잡하게 전개된다. 조선은 임진왜란 때에 명이 원병을 보내 구원해 준 은혜를 보답하기 위해서도 명을 도와 정벌에 참가해야 하는 문제와, 이제는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막강한 세력으로 성장한 후금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 하는 현안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조선은 명의 요구에 따라 징병이 불가피하지만, 실제 사정이 순탄치 않고, 징병사실이 후금에 알려질 사실이 두려웠기 때문에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 누르하치는 조선이 명과 합세하여 협공하는 것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에 회령지방의 변경을 택하여 조선의 지방수령에게 서신을 전하고 우의를 다짐하는 한편, 조선과 명의 결탁을 막기 위해 때로는 달래고 때로는 위협하기도 했다.
조선은 명과 후금의 어느 쪽 요구도 선뜻 들어주기 어려운 난처한 입장이었다. 광해군은 후금의 실력을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명의 출병요구에 대해 회피할 수 있는 가능한 방법을 강구하라고 지시하였으나 조정의 신하들은 왕의 뜻을 받아들이려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廷臣들이 「父子之義」와 壬辰의 「再造之恩」의 망집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廷臣들은 명분론에 사로잡혀 징병을 서두르려고 하였으나, 광해군은 신중론으로 맞섰다. 왕은 조선의 사정이 명을 구원할 형편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명의 조정에 알리고, 명의 諸將들에게는 보잘 것 없는 조선의 군사가 명을 원조하게 하기보다는 우리 스스로의 국토를 지키고 있으면 그것이 도리어 角之策을 펴는 데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알리고자 하였다.
왕과 비변사는 징병의 파견문제를 놓고 계속 상반된 견해를 보였다. 비변사의 대부분의 신하들이 반대하였고, 왕은 비변사의 신하나 명의 장수들보다 뛰어난 판단력을 가지고 후금의 국력을 헤아리고 있었다. 왕은 후금으로 굳이 원병을 보내어 화를 자초할 필요가 없고, 조선의 국토를 조선인이 지키고자 하였다.
대신들의 성화에 못이긴 광해군은 광해군 10년(1618년) 7월에 출정군의 대오를 편성해 출정을 대기한다. 대부분의 전투가 후금의 승리로 끝나고, 1619년에 이르러 明淸 교체의 분수령이 되는 「薩爾滸(사르후)」전투가 일어났다. 사르후전은 후금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나고, 이때 조선군은 압롭강을 大瓦洞에서 명군과 회합한다. 추위와 굶주림으로 인해 조선군은 심한 고통을 받았다. 이후 심하에서 조선군은 처음으로 후금군과 접전을 벌인다. 3월 4일 富車지방에서 명군이 후금의 대군의 습격을 받아 섬멸되고 조선군도 순식간에 패몰된다, 나머지 군사는 적에 겹겹이 포위되고, 며칠씩 굶주렸으므로 전투의지도 없었고 도망갈 길도 없었다. 이때 적군의 통사가 항복을 권하므로 부원수 金景瑞가 적장 貴盈哥에게 가 출병은 부득이했다고 말하고 화의가 이루어졌다. 이 항복은 도원수 姜弘立이 당시의 상황을 고려한 끝에 부득이하게 내린 결단이었고, 이는 왕의 뜻과 부합하는 것이었다.
왕은 명의 국력이 후금을 상대할 수 없음을 꿰뚫어 보았고 동시에 조선의 출병이 결정적으로 불리하기 때문에 원병의 파견보다는 「角聲援(양면작전)」을 고집하였다. 그리고 조선군의 총사령관인 강홍립에게 “쓸데없이 天將(명장)의 말을 좇으려고 하지 말고 오직 스스로 패하지 않을 곳에 있도록 힘쓰라”고 한 말은 자주적인 의지를 보여주는 예이다.
왕은 심원한 계책과 명민한 판단력을 가지고서 명과 후금에 대한 외교관계를 어느 한쪽에 편파됨이 없이 대등하게 유지하려는데 힘썼다. 이에 비하면 비변사의 대부분의 신하들은 명을 추종하고 의존하려는 사대사상에 젖어 있었고 후금을 오랑캐로 깔보고 斥和로 일관함으로써 對후금관계를 악화시켰다. 후금은 천명 4년에는 開原과 鐵嶺을 함락시켰고, 천명 6년 3월에는 심양과 요양을 함락시킴으로써 기세가 등등하였다. 하지만 조선의 태도는 별로 변함이 없었고, 毛文龍의 등장으로 사태는 악화된다. 모문룡은 鐵山 앞의 島에 진을 치고 명과 조선으로부터 식량병기병졸을 공급 받고 후금에 대한 견제작전을 폈다. 이 때부터 丁卯胡亂이 일어나기 직전까지 후금의 후방지역을 습격하여 내부를 교란시켰을 뿐 아니라 요동반도의 반란민을 받아들이거나 혹은 그들과 밀통하여 반란을 유도함으로써 후금의 遼西진출에 큰 장애물이 되었다.
그러다가 조선에서 1623년 仁祖反正이 일어나 광해군이 폐위되고 인조의 신정부는 西人일파에 의하여 독점되었고 반정의 명분으로서 전왕의 명에 대한 배은망덕과 奴夷(후금)와의 통호를 들었다. 이 때부터 崇明事大와 斥和論이 대두되어 胡亂을일으키는 요인을 만들었다.
2. 정묘호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