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십자가를 등에 지고 일제 식민지 시대의 감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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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민족의 십자가를 등에 지고 일제 식민지 시대의 감리교회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일제는 1905년 을사조약 후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했으며, 1907년 고종을 퇴위시키고, 한일신협약을 체결하는 등 사법권, 관리 임명권, 한국 군대 해체 등의 권한을 독식하면서 식민 통치를 감행했다. 이때 해산된 군인들의 가담으로 일어난 의병항쟁은 일본군의 저항으로 실패하였으나, 1908년 재미 한인 단체 공립협회원이자 상항감리교회의 교인인 장인환은 한국의 독립자격 없음을 주장한 미외무부 고문 스티븐슨을 저격하였고, 1909년 가톨릭신자인 안중근은 이등박문을 사살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한일합방 공작은 급속히 진행되었고, 1910년 이완용과 데라우찌 사이에 한일합방조약이 조인되었다. 이는 일본의 완전 식민지로의 전락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때 한국 사회와 교회는 조용하였는데, 이에 대해서는 몇 가지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선교사들이 이끄는 교회 전반의 일반적 양상
1) 체념어린 좌절감에서의 침묵- 외교권을 박탈한 을사조약의 충격은 컸으나, 정미 7조약 이후 이미 일본의 식민지나 마찬가지였기에 한일합방조약은 충격이 되지 못했다는 것.
2) 백만명구령운동의 영향- 이것은 망국의 충격을 흡수했던 1907년 대부흥운동과 비슷한 꼴이다. 1909년 개성에서 열린 남감리교회 소속 선교사들의 기도 모임 이후 열렸던 “복음주의선교부통합공의회”에서 리드가 범개신교회의 전도표어로 “백만 명 심령을 그리스도에게로”를 채택했던 것에서 비롯되었다.(당시 개신교 총신도 약 20만, 선교사의 총수 약 200명) 당시 하루 날을 정해 완전히 전도에 바치는 ‘날연보’가 있었으며, 집마다 전도지와 쪽복음을 나눠주기도 했다. 목표 달성은 실패했으나, 전도의 열성이 한국 교회의 특성이 되었고, 전국 복음화를 위한 연합 정신이 고양되었으며, 차원 높은 영적 구원운동이 망국의 현실을 침묵 가운데 맞이하게 하였다.
엘리트층 교인들의 반응
1) 신민회- 부패한 사상과 습관을 혁신하고, 국민을 유신케 하며, 쇠퇴한 발육과 산업을 개량하여 사업을 유신케 하며, 국민이 통일 연합할 목적을 내 걸었던 신민회는 안창호에 의해 1907년 조직되었으며, 국권을 회복하고, 사회 혁신을 이루고자 하였다. 그러나 실상은 상동교회 교인 또는 상동파 중심의 크리스찬 엘리트 구국운동단체였으며, 이후 서북지방 교회와 학교 교사 및 학생들로 확대되었다.
** 따라서 1907년은 선교사와 교회 중심의 신앙부흥운동 전개(개인의 심령구원운동 전통)와 신민회 중심의 사회구원의 전통이 세워졌던 의미 있는 해이다. 책은 교회의 침묵이 우선 역사적 변천에의 무관심이 아닌 백만명 구령운동으로의 대응이라 평가하고 있으며, 한편 신민회의 활동은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구국운동이자, 민족 실력 양성 후 국권 회복 및 문명 국가 형성을 하고자 했던 성숙한 신앙운동으로 해석했다.
2. 105인 사건과 기독교 탄압
이는 반일 민족세력의 온상으로 부각되었던 학국 교회를 제거하는 작업 중의 일환이었다. 한국 통치의 걸림돌이자, 한일합방 때 침묵으로 일관한 기독교를 수상히 여긴 일본은 헌병사령관 아카시를 중심으로 1910년 윤치호, 양기탁, 안태국, 이승훈, 옥관빈 등이 감리교인 임치정의 집에 모여 서북지방 시찰에 나선 총독을 암살할 계획을 세웠으며, 배후에 선교사들의 사주가 있었다고 조작하였다. 1911년 일제는 각지의 지도자들과 학생들을 검거하였는데,(700여명) 이 때 학생들은 6월 YMCA 하령회에 참석했다는 이유로 잡혔으며, 이의 대회장이자 신민회장이었던 윤치호는 총독 암살음모 최고 책임자라 하여 1912년 체포되었다. 또한 당시 1심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105인 가운데 94명이 기독교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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