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러의 개인 심리학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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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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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열등감과 보상은 아들러(Alfred Adler)가 만든 개인심리학의 주요 개념이다. 아들러는 대략 9년 동안(1902-1911) 프로이트와 교류하다가 관점의 차이로 정신분석학회에서 이탈하여 그의 추종자들과 함께 1912년에 ‘개인심리학회’를 만들었다. 아들러는 프로이트가 지나치게 강조한 생물학적 결정론에 따른 심리사회적 발달에 동조하지 않았다. 즉 아들러는 프로이트 정신분석 이론의 핵심 개념인 성 추동(sex drive)을 남성성 추구(masculine protest)로 대체하고 프로이트의 생물학적, 외적, 객관적인 원인 설명을 심리적, 내적, 주관적원인 설명으로 대체시켰다(Ansbacher & Ansbacher, 1956, p.9)
아들러는 인간을 사회적이며, 목적론적인 존재로 보고 이해하려고 시도하였다. 이런 점에서 아들러는 사회적 관심을 강조하였으며 “인간의 모든 행동은 목적이 있다”고 하였다. 아들러는 상담을 통해 개인이 보다 나음 생활양식을 개발하고, 잘못된 생활양식을 긍정적인 관점으로 대치하고, 또한 사회적 관심을 발달시킬 것을 강조하였다.
1. 아들러의 생애
아들러(Alfred Adler, 1870-1937)는 1870년 비엔나에서 6형제 중 2번째로 태어났다. 그는 형의 그늘에 가려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들러는 어렸을 때 구루병(골연화증)을 앓아서 형제나 친구들에 비해 신체적으로 열등했을 뿐만 아니라 4살 때 폐렴으로 거의 죽을 뻔 했으며, 길거리에서 손수레에 치여 2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다. 아들러는 이러한 신체적 열등감 때문에 엄마로부터 특별한 보호를 받아왔지만 동생들의 출생으로 그런 보호는 더 이상 받지 못하게 됐다. 아들러는 학교에서 수학성적이 매우 낮아 그 과정을 반복해야 했고, 그의 선생님이 아들러의 아버지에게 학교를 그만두고 구두제조자로 일하도록 종용할 정도로 심한 열등감을 경험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이 아들러에게 특별한 동기부여가 되어 그가 열심히 공부한 결과 학급에서 수학성적이 가장 높은 학생이 되었다.
아들러는 1897년 모스코의 기독교 집안에서 자란 급진적 사회주의 학생인 라이사 엡스타인(Raissa Timofejevna Epstein)과 결혼하여, 3명의 딸과 1명의 아들을 두었다.
1895년 아들러는 비엔나 의과대학을 졸업한 후 일반의가 되었다. 아들러는 한번도 프로이트 밑에서 공부해 본적이 없었으며 정신분석자가 되는데 필요한 정신분석을 결코 받지 않았다. 프로이트와의 관계 시작은 1902년, 아들러가 지역신문에서 프로이트의 꿈분석 이론을 공격하는 것을 방어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프로이트는 아들러의 논박에 감명을 받아 자신의 집에서 수요일마다 열리는 토론집단에 아들러를 초청하게 되었다.
아들러는 1907년 ‘기관 열등감과 정신적 보상’(Organ inferiority and its psychical compensation)을 출판하였고, 1908년 ‘공격성 추동’에 대한 글에서 성 대신에 공격성을 일차적 추동으로 대체시켰다.
아들러는 1910년 정신분석학회의 초대 회장으로 임명되었지만 프로이트와 계속 마찰이 일어나자 1911년 사표를 냈다. 같이 탈퇴한 몇몇의 사람들이 아들러와 합류하여 ‘자유 정신분석학회’라는 모임을 결성하였다. 이 명칭은 프로이트의 이론을 고수하려는 집단에 반대한다는 표시로 명명되었다. 1912년에 아들러는 ‘개인심리학회’로 명칭을 변경하고 저널을 발간하기 시작하였으며, 프로이트식 이론의 대안적인 해석을 광범위하게 받아들었다.
1912년 아들러는 ‘신경증 체제’(The Neurotic Constitution)란 책에서 자신의 새로운 심리학을 제시했는데, 이 책에 사회적 관심을 제외한 그의 주요개념들이 포함되어 있다. 아들러는 자신의 개념 중 가장 중요한 우월성 추구와 열등감이라는 개념을 정신건강에 도입하기 시작했다. 아들러식 심리치료자들은 격려를 통해서 환자들의 자존감을 향상시키고 개인의 사회적 관심을 강화시키는 방법을 사용했다. 아들러식 치료자들은 사회적으로 유용한 행동을 하게하고 올바른 방향으로 재정향을 하도록 촉구했다. 특히 초기회상과 출생순위, 꿈 등은 내담자의 생활양식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는 개념들이다.
1920년대 아들러는 주로 예방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922년에는 아마도 최초라고 할 수 있는 아동생활지도 클리닉을 창설하였다. 더불어 비엔나 아동기관에서 교사들을 대상으로 아동생활지도 훈련을 실시하였고 이를 계기로 공립학교에 수많은 아동생활지도센터가 설립되었다. 1926년부터 아들러는 미국을 정기적으로 드나들면서 폭넓은 청중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한 훌륭한 연설가였다. 1932년 뉴욕의 롱아일랜드 의과대학의 교수로 임명되었으며 1934년에 뉴욕시에 영구적으로 정착하게 되었다. 아들러는 순회강연 중에 스코트랜드의 에버딘에서 1937년 5월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