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예술의 이해 예술의 관점에서 본 아트와 대중문화의 관점에서 본 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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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대중예술의 이해 예술의 관점에서 본 아트와 대중문화의 관점에서 본 아트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하얀 바탕위에 대각선으로 하얀 줄이 있는 것 같기도 한 앙뚜와르의 그림...”
이 그림이 모든 것의 시작이었다. 규태의 오랜 친구인 수현이가 이 그림을 샀을 때 규태는 이를 인정할 수 없었다. 아니,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는 분개했고, 수현이를 회유해 보기도 했다. 그의 눈에 수현이는 세로2m, 가로 80cm의 캔버스를 1억 8000주고 산 바보였다. 남들 앞에 자신의 가치를 보여주고 싶어 안달 난 바보. 반대로, 수현이가 보는 규태는 재수 없는 지식인 이었다. 수현에게 규태는 자신의 눈에 보이는 가치만을 믿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만이 최고인 줄 아는 한심한 사람이었다. 수현이 생각하기에 어떤 그림을 무슨 가격을 주고 사던지 그것은 사는 사람의 마음이고, 그들만의 가치인데 그 누구든 그 안목을 왈가왈부 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정말 맞지 맞지는 두 사람 사이에서 늘 고민하는 덕수, 누구의 편도 선택할 수 없는 입장에서 이리저리 붙어가며 말을 바꿔갈 수밖에 없었다.
‘앵콜 아트’는 우정이라는 세상 사람들이 중요시 하는 덕목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가 가장 친한 친구인 규태, 수현, 덕수, 세 사람의 갈등구도와 화해까지의 상황을 보여주며 그 속에 뒤틀린 세상사에 대한 메시지를 통쾌하게 담았다. 관객들은 보는 내내 재미있지만, 사실 연극에 담긴 내용은 웃어넘기기만은 힘든 요즘 세상의 세태인 것이다. 연극 ‘아트’는 초연 당시 많은 상도 받고 평론가들에게 인정받는 예술성 높은 연극이다. 하지만 이 연극이 단지 예술성만을 가지고 있었다면, 지금처럼 오랜 시간동안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며 공연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아트’는 예술적인 측면뿐만이 아니라, 대중문화로서도 성공한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은 연극이라 할 수 있다.
“친구는 항상 돌봐줘야 해”
규태, 수현, 덕수는 어릴 때부터 친하게 지낸 둘도 없을 친구사이이다. 시간이 지나 지금 셋의 사회적 지위는 학생 때와는 사뭇 다르다. 규태는 이름을 알긴 힘들지만 그래도 어느 대학 교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꽤 똑똑한 놈이다. 수현이는 꽤나 유명한 사람들을 치료하며 돈을 좀 만지는 피부과 의사이고, 덕수는 애초부터 성격이 야무지질 못하고 허름한 구석이 있어 이제야 개인 문방구를 하나 가지게 되었다.
문제의 발단은 이것이다. 규태가 생각하기에 수현이는 어릴 적부터 자기 없이는 뭘 잘 하고 싶어 하지 않을 정도로 자신에게 기대고, 자신을 좋아하던 놈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수현이는 자신보다 사회적 지위가 높아지는가 싶더니 이내 자신의 손을 빠져나가 다른 부류의 사람이 되어서는 1억 8000하는 앙뚜와르의 그림을 얘기도 없이 덜컥 사버린 것이다. 연극에서 규태는 수현에게 자신에게 의논도 없이 그림을 산 것이 서운해서 그랬다는 말을 한다. 이 때, 규태는 정말 수현이 자신에게서 멀어지는 것 같아 섭섭해 한 것일까? 아니면 똑같은 선상에서 출발했는데 어느 새 자신보다 앞서 가있는 것 같은 옛 친구를 질투하는 것일까? 결국 이야기의 시초는 하얀 바탕에 대각선으로 하얀 줄이 있을지도 모르는 앙뚜와르의 그림 한 점이었지만, 사실 문제는 그림의 밑바닥에 깔린 두 사람의 앙금이었다. 그 동안 수현이는 그 나름대로 항상 자신이 다 알고 있다는 식의 규태의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었다. 조금 남보다 똑똑하다는 건 인정하겠는데,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마저 자신보다 잘 알고 있다는 듯 한 태도가 수현의 배알을 뒤틀 은 것이다. 자신이 규태보다 못한 거라곤 하나도 없는 것 같은데 말이다.
남이 잘되는 일에 배 아파하는 규태나 자신이 남보다 낫다고 생각하며 오만을 떠는 수현, 이 들은 현대사회에 만연해 있는 사람들의 진심을 이야기한다. 빙빙 돌려가며 우정이 왜 변했는지에 관해 서로 싸우고 있지만 결국하는 얘기는 남이 나보다 잘난 꼴은 보기 싫다는 거다. 이 사이에 있는 덕수는 자신이 굉장히 착하고 남 괴롭힐 줄 모른다며 나 몰라라 하고 있지만, 사실 난 덕수의 태도가 가장 얄미웠었다. 그래도 규태, 수현은 자꾸 꼬여만 가는 상황에 답답해하며 싸우기라도 했지만, 그는 이쪽에 붙었다 저쪽에 붙었다 하며 상황에 따라 계속 말을 바꿨다. 규태에겐 그림이 그냥 판 데기 같았다고 했지만, 수현에겐 그림을 볼 줄은 모르지만 뭔가 느낌은 느껴진다는 식이다. 내 눈에 그는 속물이었다. 남에게 상처주기 싫고 얼굴 찌푸리기 싫어서 좋은 게 좋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자신이 다치기 싫은 것이다. 싸워 봤자 자신만 손해고, 별 맘에 있지도 않은 결혼 안 해봤자 자기 손해라는 계산이 그의 무의식에 있는 것이다.
학교에 있을 때엔 누군가가 나보다 공부를 잘하고 선생님께 예쁨을 받더라도 그건 고만고만한 도토리 키 재기의 문제였다. 그런다고 해서 당장 바뀔 상황이나 문제는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학을 가며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하더니, 졸업을 하고 사회에 뛰어들었을 때엔 더 이상 작은 차이가 될 수 없다. 선생님께 온갖 아양을 떨던 친구는 나 보다 대학을 못 갔음에도 불구하고 회사에서 나보다 높은 직책에 있다든지, 공부를 엄청 잘하던 친구는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힐 대학을 갔음에도 불구하고 졸업 후 취직을 못해 백수로 있다던가 하는 모습은 분명 달라진 우리들의 인생이다. 그 속에서 우리는 차마 남 앞에서 말할 수 없는 진심들을 가지고 있다. 연극 ‘아트’에서 이것은 ‘오랜 친구’라는 타이틀 앞에 드러낼 수 없는 마음이었고, 또 ‘오랜 친구’이기에 더욱 느끼기 쉬운 감정이었다. ‘아트’에서는 이 감정들의 해소를 덕수의 매직펜으로 풀었다. 어디에나 잘 써지고, 절대 지워지지 않는다던 그 펜. 그 펜으로 규태의 자신의 불후의 명작을 앙뚜와르 그림위에 그린다. 비록 그 일이 이미 지워질 것이라는 걸 알고 있던 수현의 잔머리였다 할지라도 규태는 1억 8000만 원짜리 그림위에 스키 타는 졸라맨을 그리며 희열을 느꼈다. 그 동안 쌓였던 규태의 수현에 대한 자격지심을 단번에 날려주던 순간이었다. 수현은 이미 그 그림을 지울 수 있을 것임을 알고 있었음으로, 졸라맨을 그리고 좋아하는 규태를 보며 결국은 내가 너보다 위에 있다는 생각에 즐거워했다. 하얀 바탕위에 있는 하얀 그림. 한 사람이 공간을 가로질러 멀리 사라지는 것을 표현한 그림. 이 그림은 그 들의 엉켰던 마음, 치졸한 자존심들을 풀어줄 수 있었던 1억 8000만 원짜리 값어치의 카타르시스였던 것이다.
연극 ‘아트’에서 주인공들은 공연 내내 자신의 진심을 이야기 하지 않는다. 왜 우정이 변해가고 있는지, 왜 친구가 그림을 산 것이 문제가 되는지에 대해 의문만 던진다. 하지만 보는 관객은 다 알고 있다. 왜냐하면 이미 관객들도 다 경험해본 마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이 왜 화를 내고 짜증을 내는지 단번에 이해할 수 있고, 그렇기에 그들의 싸움이 관객에겐 웃음을 주고, 때론 눈물을 준다. 사람들의 속된 마음을 공연에 한마디도 담아내지 않으면서 극 전체에서 그 것을 비꼬고 있는 연극 ‘아트’. 사실 작가는 ‘아트’를 통해 자신은 아닌 척 웃고 있는 관객들을 비웃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아트’가 작가에겐 마치 수현이 다 알면서도 규태에게 매직펜을 건넨 것처럼, ‘난 너희들 속마음 다 알아’하면서 즐거워하는 관객을 바라보며 카타르시스를 느낀 것은 아닐까. 내가 느낀 연극 ‘아트’는 공연자체가 하얀 바탕의 대각선으로 하얀 선이 있을 것 같은 앙뚜와르의 그림이었다. 사람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해석여부를 가지고 있고, 진정한 속마음을 드러내게 해주는 열쇠였다.
“이제 나하고 같이 웃지도 않아”
규태가 극 중간에 덕수에게 수현과의 관계를 설명하며 꺼낸 말이다. 누군가와의 관계를 가장 명확하게 설명해줄 수 있는 단서라고 할 수 있다. 같이 있을 때 웃음이 나질 않는데 그 누가 그 사람과의 관계가 좋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는 대중문화로서의 ‘아트’를 가장 잘 설명해줄 수 있는 대사이기도 하다. 내가 생각하는 대중문화의 핵심은 말 그대로 ‘대중성’이다. 모두에게 호응을 얻어야지만 의미가 있는 것이다. 연극 ‘아트’가 공연되는 2시간여 동안 모든 관객들은 ‘아트’와 함께 웃었다. 관객들이 웃을 수 있었던 이유 중의 하나는 앞에서도 이야기 했듯이 주인공 세 사람의 캐릭터가 너무나도 사실적이었기 때문이다. 당장 내 친구일 것 같은, 나 일 것만 같은 캐릭터들 이었다. 이런 캐릭터들의 설정은 자연스레 흔히 느낄 수 있는 상황을 이끌었고, 이는 관객들에게 궁극적으로 편안함을 주었다. 극을 보는데 있어 억지스러움을 찾을 수 없으니 웃음이 끊기는 상황이 없고, 자연스레 울먹거릴 수 있는 시간이 생겼다. 연극 ‘아트’는 관객들의 ‘공감’을 얻어내는데 성공한 것이다.
사전으로 대중문화를 찾아보면 한 페이지는 넘게 설명이 나와 있다. 이것저것 여러 가지를 설명하고 있지만, 결국 따져보면 대중문화는 대중이 형성하는 것이다. 한, 두 사람만이 좋아하고 이것이 트렌드라고 외쳐서 될 것이 아니다. 보편적인 사람들의 공감을 얻고 그들이 그 트렌드를 지속시키고자하는 의지가 있을 때야 비로소 대중문화로 자리 잡을 수 있다. 이 때 사람들의 공감을 얻는 일은 쉬운 것이 아니다. 현대 사람들은 보편화된 교육체계와 생활환경의 개선으로 눈높이가 높아졌을 뿐만 아니라, 사회화가 되어있다. 사회화가 되어있다는 것은 개개인이 사회에 맞춰 자신을 적절히 다스릴 줄 안다는 것이다. 이는 사회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꼭 필요한 것이지만, 사회화가 잘 되어있을수록 개인에 대해 알기는 힘들다. 개인의 이기심이나 생각을 적절히 숨기고 살게 되기 때문이다.
나는 함께 웃고, 울며 호흡하는 것이 ‘공감’을 이해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서로 이해를 했고, 그것을 받아들였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아트’는 어떻게 사람들의 ‘공감’을 얻어낼 수 있었을까? ‘아트’는 사람들의 진실을 얘기하여 사회화된 사람들에게 자신의 입이나 행동을 거치지 않고 자신의 진실한 내면의 모습을 보여주어 카타르시스를 준 것이다. 유치하게 토닥대며 싸우는 모습을 보며 사람들은 한바탕 통쾌하게 웃을 수 있고, 공연이 끝난 후엔 끝에 알싸하게 남는 자기 내면세계의 인간다운 모습을 한번쯤 생각해보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공감’을 얻게 되면 그 문화는 간혹
참고문헌
참고 자료
http://blog.naver.com/idahoya?Redirect=Log&logNo=100013334803
http://blog.naver.com/shuriji?Redirect=Log&logNo=18694537
http://blog.naver.com/alinbrian?Redirect=Log&logNo=150016213336
연극 ‘아트’ 대본
‘앵콜 아트’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