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문화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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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중국의 문화유적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많은 사람들이 알듯이 중국은 오랜역사와 발달된 문화등이 많이 있다. 내가 소개하려는 것은 중국의 문화유적에 대해서이다. 중국엔 많은 문화유적들이 있다. 북경뿐만 아니라 다른 지방들에도 많은 역사와 전통이 있다. 중국에는 역사가 긴 만큼 각 왕조들의 특성을 드러낸 많은 유적들이 있다.
내가 소개할 문화유적지는 북경의 문화유적에 대해서이다. 북경의 문화유적에는 천안문, 천단, 원명원, 자금성, 이화원, 왕부정, 북해공원, 만리장성, 용경협, 명13릉, 등 유명한 문화유적이 있다. 이중에서 천안문, 자금성, 천단, 만리장성, 이화원이 내가 소개하려는 곳이다.
1.만리장성
만리장성은 북방 흉노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은 건축물중 하나이자 세계7대 불가사의중 하나이기도 하고 위대한 건축물이기도 하다. 만리장성을 쌓기 위해 많은 백성들이 동원되었고 오랜시간이 걸려 만들어 졌다. 북방민족의 세력이 강력해지면서 북방민족은 간단히 만리장성을 넘어 중국의 농경지대를 침입했고 화북지방의 농촌에 큰 피해를 입혔다. 이러한 전쟁 등으로 인해 여러차례 회손되어 복원하기도 했지만 지금의 만리장성 중에 어떤 곳은 회손이 심해 복원이 안되어 그 당시 훼손이 된 그대로인 알아보지 못하는 채로 남아있는 곳도 있다. 만리장성의 기원은 춘추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만리장성 이라는 말이 문헌에 나타난 것은 전국시대 이다. 전국시대의 장성은 북방에만 한정되지 않고 중원에 나라를 세운 제(齊), 중산(中山), 초(楚), 연(燕), 조(趙), 위(魏), 진(秦)등의 여러나라가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여 장성을 구축하였다. 과거의 만리장성은 오로지 판축공법을 써서 흙으로만 축조되었다. 만리장성에는 일정한 간격을 두고 돈대가 설치되어 있고, 도로가 교차하는 지점에는 출입문이 설치되었으며 수비병이 주둔했다. 이러한 장소를 관(關) 또는 구(口)라고 부르는데 산해관· 사후구[殺虎口]· 쥐융관· 두스커우[獨石口]·자위관 등이 특히 유명하다. 역사적으로 보면 만리장성은 다양한 의미를 갖고 있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방위선으로서의 군사적 의미이다.
만리장성에는 많은 전설들이 있다. 많은 전설들 중에 내가 아는 전설중 하나는 제나라의 ‘맹강녀 이야기’에 대해서 이다. 어느 마을에 맹(孟)이라는 가문과 강(姜)이라는 가문이 벽 하나를 두고 이웃으로 살았다고 한다. 그 두 집안은 함께 넝쿨 박을 담 위에 심어 재배하고 박이 열리면 그 박을 시장에 팔아 생긴 이익을 함께 나누기로 했다고 한다. 열심히 박을 관리한 결과 큰 박이 하나 담 위에 열렸다고 한다. 그 박이 여물자 두 집안의 가장들은 그 박을 나누어 가지기로 합의했다고 한다. 그래서 박을 나누기로 한 날에 그 박을 반으로 갈랐더니, 안에서 "여자아이"가 나왔다고 한다. 양쪽 집안 어른들의 합의 끝에 이 여자아이를 맹씨와 강씨 집안이 함께 키우기로 합의했다고 한다. 이에 그녀의 이름은 양쪽 집안의 성을 따서 "맹강녀孟姜女"로 지어졌다고 한다. 그녀는 진시황제도 반할 만큼 예뻤다고 한다. 진시황이 만리장성을 쌓을 당시에 성 1리를 쌓을 때마다 한 사람씩 죽을 정도로 희생이 많았다고 한다. 만리장성을 쌓으려면 만 명이 필요하다는 노래가 나돌정도 였다고 한다. 중국 소주에 살고 있던 만희량이라는 사람 또한 그 노래의 희생양이 되었다고 한다. 만희량은 관원들을 피해 떠돌아 다니다가 맹강녀의 집으로 숨어들어가 맹강녀를 만나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맹강녀와 만희량의 인연이 사랑으로 이루어져 결혼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결혼한지 사흘도 안 되어 신랑은 관원들에 의해 만리장성 쌓는 곳으로 끌려갔다고 한다. 맹강녀가 만희랑을 기다린 지 반 년이 지날 무렵 꿈속에자주 나타나서 남편이 문을 두드리며 "추워 죽겠습니다." 라고 했다고 한다. 맹강녀는 그 길로 솜옷과 보따리를 들고 몇 달에 걸쳐 만리 장성 쌓는 곳을 물어서 물어서 찾아 갔다고 한다. 그러나 맹강녀는 본인이 찾고 있는 남편은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녀가 들은 충격적인 사실 그녀의 남편이 죽었다는 것이다. 너무나도 원통한 맹강녀는 몇 날 며칠을 통곡하면서 남편을 살려내라고 울부짖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날 갑자기 천둥이 치고 폭우가 쏟아지고 성벽이 무너지고 그곳에서 맹강녀의 남편인 만희량의 시신이 나왔다고 한다. 무너진 장성 속에서 무수한 시체들도 나왔다고 한다. 남편의 죽음에 슬픔을 견디지 못한 맹강녀는 남편 만희량의 시신을 안고서 강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고 한다. 지금도 중국 하북성(河北省) 산해관(山海) 쪽에 그녀의 묘가 자리잡고 있는데 그 옆에는 원망스러운 눈초리로 멀리 만리장성을 바라보고 있는 맹강녀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고 한다. 비록 전설이긴 하지만 이런 전설만으로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만리장성으로 인해 많은 고통과 슬픔 등으로 세월을 보냈는지 알 수 있을것 같다. 예전에 당태종이 사람이 장성보다 낫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전쟁은 물리적인 방어보다 사람의 지혜로 막아야 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전쟁에서 나라를 지키고자 지어진 만리장성이지만 전쟁을 치른 것보다 더 큰 고통과 짐을 국민들에게 지어준 결과만 낳은 것이라고 한다. 만리장성은 위대한 건축물인 동시에 우리에게 많은 것을 일깨워주는 역사의 스승인 것같다.
2.천단(天)
천단은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사적이다. 명청시대 중국에서 군주가 제천의식을 행하던 도교 제단이기도 하다. 매년 풍년을 기원하는 황제의 연례행사이자 비가 오랜시간동안 오지 않으면 기우제를 지내기도 했다. 고대 제단 규모중에서 가장 큰 제단 규모로 만들어졌다. 1998년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됐다.1406년에 건축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1420년에 완공이 되었다. 천단이 처음 건설됬을때에는 천지단(天地)이라고 불렸었다. 1530년에 3개의 제단을 더 추가했고 이때부터 “천단”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동쪽으로는 일단(日), 북쪽으로는 지단(地), 서쪽으로는 월단(月)을 추가하였다. 현재의 규모는 청대의 건륭제 때 건축된 규모이다.
천단은 1860년 제2차 아편전쟁때 영국과 프랑스의 연합군, 1900년 북청사변때 8개나라의 침략등이 있었다. 1914년 원세개(袁世凱)가 중화제국을 선포하고 자기자신을 황제라고 칭하였고, 천단에서 대제를 열었다. 대제를 연 이유는 자신이 중국 고대 삼황오제로부터 내려오던 중국 전통 왕조의 계승자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의미하기 위해 대제를 열었다. 1918년에 천단을 공원으로 바꾸고 일반인들도 입장할수 있도록 만들었다. 천단에는 원구단, 황구단, 기년전 세 개의 단이 있다.
1)원구단
황제가 하늘에 제를 올리기 위해 의식을 거행하던 장소이다. 명나라때 만들어졌다. 풍작을 감사하는 의식을 거행하고 가뭄이 들었을때는 비가 내리도록 기우제를 지내던 곳이다. 우주관을 따르고 있다고 하며 원형의 형태로 만들어 졌다.
2)황구단
원구단의 북쪽에 있는 있다. 하늘에 제사를 지낼때 사용하던 신패 물건등이 보관되어 있는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