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송의 주희(朱熹)였다. 주희가 집대성한 성리학은 자연과 사회의 발생과 운동을 이(理)와 기(氣)의 개념에 의하여 설명하였다.
3. 성리학 도입의 배경
당대 말기의 유학자들이 당시 사회의 문제점이 상당 부분 불교 때문에 나타난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처럼 고려 말기의 신진사대부들도 불교 때문에 당
남송대에는 마하파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산수화가 발달하였으며 문인화보다는 화원화가 좀더 발달한 시기였다. 공예에서는 이 시기에 중국 전역에서 도자기가 제작기 시작하였고 각 요지별로 특징적인 도자기가 생산되기 시작하였다.
대표작가:
형호 이성 동원 거연 곽희 미불 이당 마린 하규 등 있
남송대에 고개를 들었으나 화원화가들에 밀려 성행되지 못한 문인화가 정식으로 확립된다. 이들은 마음을 얻은 것만이 영원히 전해질 수 있다고 생각했으며, 사물의 대한 느낌과 전달에 치중하여 함축적인 화풍을 숭상하고, 예술의 공용성과 통일된 규범은 다소 쇠약해지는 경향을 보였다.
명대 동기
남송을 평정해서 명실공히 중국전토를 영유하게 되었는데, 이에 멈추지 않고 일본 베트남 미얀마 자바 등지에도 침략군을 보냈다.
원나라는 쿠빌라이칸이 다스리는 동안에 동아시아 전역의 대제국이 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쿠빌라이칸은 몽골제국의 종주권도 계승한 것이라며 서방의 한국들(킵차크
남송 때 양산박의 영웅 호걸들의 이야기가 널리 유행하였는데, 당시 사람들이 모두 즐겨 들었기 때문에 설화인들은 이 이야기를 소재로 연출하였고, 또 문자로 기재하였다. 화본 『대송선화유사』 중에는 오늘날 『수호전』의 대략적인 줄거리, 인물의 윤곽이 갖추어졌다. 『수호전』의 중심 인물인
남송 유약기술을 도입, 세토야키를 일으키고 무로마치시대와 전국시대를 거쳐 각양각색으로 성장하던 도예문화는 도요토미히데요시와 센노리큐의 다도문화를 만나면서 꽃을 피우게 된다. 이때 히데요시의 조선침공으로, 이참평을 비롯한 수많은 조선 도공들이 끌려와 일본 도예의 뿌리가 되었다. 조
남송 시에는 이를 분할하여 절동로(浙路)와 절서로(浙西路)를 두었다. 원대에는 절동해우도(浙海右道) 및 강남절서도(江南浙西道)가 되었고 명대에는 저장성(浙江省)을 두어 저장이라는 이름이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이후 절강포정사사(浙江布政使司)로 개칭되었으며 청대에는 저장성(浙江省)으로 개
주자 [朱子, 1130.10.18~1200]
주 자 [朱子, 1130.10.18~1200]
주자의 생애
주자학(성리학)을 집대성한 중국 남송의 유학자
1130년 중국 푸젠 성 우계에서 출생
1172년 사마광의 역사서인 자치통감 을 재편집‘자치통감강목’완성
1175년 철학자 육구연(陸九淵)과 철학논쟁을 벌임
1177년 ‘논어’와 ‘맹자’에 대한
남송의 주자에 의해 계승되면서 종합적 이고 입체적인 면모를 띠게된다. 주자가 말하는 ‘이(理)’는 정명도가 말하는 우주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천리’, 원시적인 ‘조리’의 의미, 돌의 무늬라는 의미의 ‘이(理)’. 사람이 반 드시 지켜야 할 ‘도리’라는 의미를 모두 반영하고 있다.
3. 선종의 선
남송의 마하파 등에 의해 영향을 받은 안견의 넓은 공간개념, 삼단구도법, 그림전체의 조화를 특징으로 하는 안견의 화풍을 계승하는 화풍이다
이중 안견파 화풍을 계승했던 이정근, 이흥효에 대해서 알아보려한다.
이정근
-1531(중종 26)~ ?
이정근의 본관은 경주, 호는 심수(心水)로 아버지와 동생, 사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