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략은 부정부패와 무능무력으로 망해가고 있었던 조선왕조에게 개방과 개혁을 강요하였다. 일제는 갑오농민전쟁을 구실로 조선에 출병하고나서 이른바 ‘내정개혁방안 강령 5개조’를 이행하라고 강요하였다. 일제가 군대를 동원하여 친중파 수구정권을 무너뜨리자 친일파 개혁정권이 등장했다.
출병이 어려운 상황이었기 때문에 양국 간에 강화 교섭이 시작되었다. 후금은 강화 교섭 3일 만에 ‘강화서약’을 맺고 군대를 철수하였다. 강화서약으로 조선은 후금과 ‘형제지맹(형제의 나라)’을 맺게 되었다.
2. 병자호란
전쟁이 끝난 후 후금은 승전국으로서 무리한 요구를 하기 시작하였다.
시베리아를 정복하고 19C에 흑룡강 지역과 연해주와 사할린을 점령하고 여순, 대련의 부동항을 점령한 후 편승 만주를 점령하여 조선에까지 팽창의 손을 뻗쳐왔다. 러시아가 아시아에 관심을 두는 동안에는 독오 양국과의 대립은 격화되지 않았다. 그러나 러시아 독일 오스트리아가 발칸에 진출함으로
⑶ 청일전쟁에 대한 열강의 태도
당시 동북아시아 지역에서 가장 큰 이해관계를 갖고 있던 국가는 영국과 러시아였다. 그 중 일본의 이러한 개전 움직임에 먼저 행동을 취한 것은 러시아였다.
① 러시아
일본 주재 러시아 공사 히트로보의 무쓰 외상 방문(조선출병과 내정개혁에 대한 논의)
출병요구에 불응, 전투에서 고전을 하고 장군마저 급사하는 바람에 전투는 중지되었다. 개국에 의한 경제의 혼란과 정국을 둘러싼 항쟁은 사회불안을 야기 시켰고 쌀값 폭등으로 에도(江戶)ㆍ오사카(大坂) 주변에서는 대규모의 민중소요가 발생하였는데 이는 이윽고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에도 막부의
출병시켜 일본군을 제압
6) 텐진협정(1885)
- 갑신정변의 사후처리문제 논의 / 청은 군대를 출병시켜 일본군 제압
7) 영국의 거문도 점령
- 영국의 러시하 남하 견제
※ 청, 일간의 대립은 영국과 러시아의 한반도 진출을 불러옴
8) 동학농민운동(1894)
- 조선 조정이 청에 파병을 요청 / 텐진조약에 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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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차 조선에서 중대한 사건이나 변란이 발생하여 양국 또는 일국이 조선에 출병할 경우에는 서로 문서로써 알리고 사태가 수습되면 곧 철군한다.
결과 - 이 사건을 계기로 청국의 조선지배는 더욱강화되었고, 조선정부는 이런 지배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러시아에 눈길을 돌리게 되었다.
; 시베리아 계통(중국과 다름)- 무문토기와 반월형석도 출토
(3)경제-벼농사 시작, 농경비중 증가
(4)사회-지배와 피지배 관계 성립(부족간의 정복전쟁),족장들의 권한 강화(계급지배사회 출현; 지석묘)
(5)청동기인은 신석기 문화를 흡수하여 새로운 사회의 주인공으로 등장, 우리 민족의 주류 형성
시베리아 철도는 이미 중앙아시아에 이르고 수년 후 준공되면 러시아 수도를 떠나 십 수일이면 흑룡강에서 말에게 물을 먹일 수 있으며, 시베리아 철도가 완성되는 날이면 곧 조선에 사건들이 많이 일어날 것이다"고 썼다.
2) 군사적 배경
1875년 운양호 사건 직후 일본은 [육군직제 및 사무장정]을
출병을 약속받았다. 신라와 당나라는 백제와 고구려의 국내정세가 매우 혼란한 시기였던 660년과 668년에 각각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켜 이를 실현했다. 이후 당나라는 동맹국이던 신라까지도 병합하려 했으나 신라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혀 성공하지 못했다. 이로써 신라는 대동강 이남의 한반도를 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