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진 계획에 대하여는 반대의 견해를 나타내었다.
한국전쟁의 발발과 관련하여 미국의 가장 중요한 문제는 미국이 과연 북한의 침공을 전혀 예측하지 못하였는지 즉, 북한의 기습공격이었는지 여부이다. G2의 보고나 KLO 보고 등의 자료들을 토대로 판단하건대 미국은 전쟁 발발 당시 이미 소련의 간접
남북관계
1950년-1953년 기간의 전쟁은 한국에게 엄청난 피해를 가하였다. 전쟁에서 100여 만의 사상자가 발생하고 공업시설, 민가, 기타 사회공공시설의 3분의 1이 파괴되어 한국은전에 없던 손실을 당하게 하였다. 그 가운데 공업생산시설이 42%이고, 공장건물은 44%였다. 전쟁 이후 한국경제는 악순환으
한미공모설
이승만의 제1공화국의 북진 통일론이 대남 도발을 촉진시켰다는 설이다. 이승만은 여러 차례 무력 북진 통일을 부르짖었으며, 미국의 군사 원조를 공공연히 요청한 바 있다. 실제로 1950년대 초부터 남북은 경쟁적으로 군비를 증강시키기 시작했고, 미국이 국군을 강화시키면 이승만이 무력
공격을 공공연히 주장했다. 그러나 맥아더 장군의 이와 같은 행위를 군통수권자인 대통령 자신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한 트루먼 대통령은 1951년 4월 11일 맥아더 장군을 모든 직위에서 전격 해임하고 리지웨이 장군을 그 후임으로 임명했다. 이때부터 UN군 측과 공산군 측은 전쟁의 제한에 관한 묵시적인
남북 공동성명이 성사되기 전으로 남북한 사이에 어떠한 공식적인 대화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 시기는 제1공화국시기(1953~1960), 제2공화국시기(1960~1961), 제3공화국시기(1961~1971)의 세 시기로 세분화할 수 있다. 이정복. 『한국 정치의 분석과 이해』, 서울 :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6, 71쪽
제1공
공격을 받았기 때문도 아니고, 체제내부의 봉기나 내란이 원인이 된 것이 아니지만, 제국주의 연합세력의 반사회주의 책동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한 점 즉, 사회주의 내부에 올바른 정치방식을 확립하지 못함으로써 정치적 불안정을 야기했기 때문으로 인식한다. 사회주의 내부에 올바른 정치방식
실패했던 반민특위사건, 분단에 있어서 이승만의 책임론, 제 1공화국의 대미관계에 대한 기존의 비판론과 새로운 해석을 제시해본다. 아울러, 단순히 과거사만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친일파청산과 남북분단, 한미동맹 등의 현재적 의미를 띠는 문제들에 대한 건설적인 토론을 기대해본다.
실패했던 반민특위사건, 분단에 있어서 이승만의 책임론, 제 1공화국의 대미관계에 대한 기존의 비판론과 새로운 해석을 제시해본다. 아울러, 단순히 과거사만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친일파청산과 남북분단, 한미동맹 등의 현재적 의미를 띠는 문제들에 대한 건설적인 토론을 기대해본다.
전쟁의 모든 책임을 북한에게 돌리는데 성공하였다. 또한 미국은 ‘평화의 사도’라는 대단히 매력 있는 명분을 갖고 남한을 자신의 군사기지로 지배할 수 있었다. 휴전 바로 뒤인 1953년 10월 1일 체결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통해 미국은 주한미군의 주둔을 합법화하고 동시에 한국군을 확실하게
한국전쟁은 한국민에게는 민족분단과 전쟁의 아픔을 남겨두고, 미국에게는 승리도 패배도 아닌 다만 명예로운 종전을 위한 철군여건을 마련하는데 그친 결과가 되었다. 한국전쟁은 한미 상호방위조약을 통해 새로운 한․미 관계를 맺게 한 것이다. 한미 상호방위조약은 미군의 한국주둔에 법적 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