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20년대 중반 이후의 독립운동과 8.15해방 이후 신국가건설운동을 이끌었던 지도적 이념은 다양하였지만, 학계에서는 크게 보아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로 양분하고 있다. 그러나 사회주의독립운동도 민족해방운동의 형태를 보였기에 ‘민족주의 vs 사회주의’가 아닌 우익진영과 좌익진영의 구도로 설
1995년, 성재 이동휘가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에 추서되었다. 이는 이동휘를 비롯해 그동안 사회주의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외면당했던 만주·연해주의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우리 사회의 재평가를 보여주는 하나의 사건이었다. 1980년대 민주화 운동과 뒤이은 냉전체제의 몰락은 반쪽에 불과했던
한국사로의 발전을 꾀할 수 없다. 이러한 맥락에서 최근 민족주의자를 재평가하여 민족주의자로 포장된 친일파를 찾아내고자 하는 시민운동과 학계의 연구는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독립기념관에 전시된 민족대표 33인의 미니어처가 하나둘씩 제거되고 있는 등, 시민운동의 결과는 가시적으
사회주의자들에게 당창건을 그 어떤 활동보다 우선적으로 추진할 것으로 촉구한 것으로 여겨졌고 국내 사회주의 그룹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그 결과 이미 1923년 서울파에 의해 창립된 고려공산동맹은 당시까지 식민지 조선에서 노농운동과 청년운동 등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던 것에 고무되어
독립운동가들이 그를 부정적으로 인식했다는 기존의 학설은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일제시대의 김옥균 연구와 평가는 한철호의 「개화·일제강점기 김옥균에 대한 역사적 평가」(2004)의 pp.55~56를 참조하였다.
4. 북한학계에서의 김옥균 연구와 평가
사회주의 체제가 성립된 이후 북한의 근대사
운동의 주체로 등장하는 결정적 계기를 만들었다. 그리고 국내에서의 민중을 중심으로 한 항일 투쟁은 물론 국외에서의 항일 무장투쟁의 활성화를 가져오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 등 민족 해방운동의 중요한 분수령이 되었다.
3․1운동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한국사의 어떤 주제보다도 많은 연구
운동은 재야 남인의 영남만인소 정도였다. 정치세력 측면에서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세도정치기의 과거급제자들은 당상관이상으로 올라갈수록 서울에 거주하는 6대 가문을 중심으로 15개 정도의 유력 성관에 집중되었다. 오히려 병란, 민란으로 표현되는 피지배층의 저항운동이 집권층에 실제적인
Ⅰ. 개요
억압과 수탈의 대명사인 식민지 농촌의 농민들은 이중의 수탈을 당한다. 일제의 식민지 정책으로 인한 정치 경제적 수탈과 일제가 식민지 통치의 파트너로 삼기 위해 정책적으로 형성한 지주들의 수탈이다. 조선인 및 일본인 지주들은 가혹하게 소작료를 거둬들이면서 쌀 수출을 통해 떼돈
독립운동 상황의 국내 전달과 국내에서의 독립자금 모집 및 반일활동의 지휘 등을 위한 연락망으로 사용되었다. 임시정부는 의정원의 결의에 의하여 국내외의 동포에게서 인구세(人口稅)를 20세 이상 남녀 1인당 1원씩 징수하고 독립공채(獨立公債)를 발행할 것을 결정하고 연통제를 통해 이를 실시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