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주의자들이 마지막에 가서는 친일로 변절했는지에 대한 논의는 하지 않고 있다. 이는 또 다른 역사의 왜곡을 가져올 수 있을 것이다. 본 보고서는 이러한 논점에서 변절한 지식인의 대명사인 춘원 이광수의 민족주의적 운동과 작품, 친일적 행위를 살펴보고 이를 통해 그 당시 대부분의 지식인들이
민족개조론」, 「민족적 경륜」 등의 논설을 써서 발표했다. 1939년에는 친일 문학인들의 모임인 조선문인협회 회장이 되었다. 이후 줄곧 친일 연설을 하며 전국을 순회했다. 해방이 되자 친일파로 지목되어 곤란을 겪었고, 1949년 반민법에 걸려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기도 했다. 6·25전쟁 중인 1950년 7
민족전선 및 지방선거 행동강령의 규정안
(3) 미군정의 규정
(4) 미소공동위원회 결의 6호 질의에 대한 임시정부수립대책협의회 답신
(5) 위 질의에 대한 북조선노동당 답신
(6) 위 질의에 대한 민전의 답신
(7)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의 「민족반역자, 부일협력자, 간상배에 대한 특별조례」에 나타난
건설 또한 활발하게 이루어져 방법론을 달리한 국외에서의 독립운동이 여러 방면에서 추진되기에 이르렀다. 국내에서는 일제의 식민통치 방침과 맞물리면서 문화운동과 자치운동으로 대표되는 민족개량주의적인 타협적 성격을 띤 부르주아운동이 나타나고 있었다.
Ⅲ. 이광수의 「민족개조론」
강자에 대한 패배를 불가피한 숙명으로 보고 그 저항의욕을 약화시키는 패배주의를 낳았다
대한제국기 사회진화론을 찬성한 인물 : 유길준, 윤치호
대한제국기 사회진화론을 반대한 인물 : 이승만, 장면
일부 지식인에게는 열등감을 느끼게 해, 변모케 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 이광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