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신 매일신보, 서울프레스, 경성일보와 같은 조선총독부의 기관지 역할을 하는 어용신문을 새로 발간하는 등. 언론, 출판 집회, 결사 등 한국인들의 기본권을 완전히 부정하였을 뿐만 아니라 식민지 교육을 통해 일제 식민지 통치의 근본을 이루고 있었던 동화정책을 관철시키고자 하였다.
민족을 위해 자신의 몸을 초개같이 바치고 간 분들일 경우 한이 맺혀 구천을 떠돌 영혼들을 생각할 때 하루 속히 신원복원을 해드려야 할 입장이며 그분들의 정신을 이어받아 후손에 물려주어야 할 것이다.
Ⅱ. 호남의병(전라도의병)의 배경
1. 한말 호남지역의 경제의 구조적 특질
1) 쌀과 면화
. 사실 민족사관이라는 것이 자민족 내부적 입장에서 보면 민족의 단결력을 높이고 자긍심을 고취시켜 국가적 결속력을 다지는데 크게 이바지 함이 사실이나 타 민족이나 타 국가의 입장에서 본다면 자칫 특정국가의 우경화로 인한 국제사회 질서의 파괴나 무질서를 우려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하여 韓國獨立實現에 適用하며, 특히 民主陣線의 最後勝利를 豫祝한다.
大韓民國 23年 12月 10日
大韓民國 臨時政府 主席 金九
外務部長 趙素昻
이 대일본 선전포고는 한국독립운동사에서 매우 중요한 것이다. 물론 한국민족은 이미 1905년 전후부터 일본 제국주의를 한반도에서 추방하기 위해 의병
민족ㆍ민주운동과 호남의 위상
1-1. 일제 강점기 호남에서의 민중운동
정순제,「호남종횡관(湖南縱橫觀)」: “전남은 과거 갑오운동과 현금의 농민운동의 진원지로서 무산의 소작인들은 지금으로부터 4년 전부터 약자의 무기는 오직 단결뿐이라는 표어를 내걸고 면 단위로 노동단체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의 최고기관으로서 임시정부를 건설하자는 것이다. 또 선언에서는 한일병합을 융희 황제(순종)의 주권포기로 단정하고 대신 주권불멸론(主權不滅論) 즉 융희황제가 주권을 포기한 것은 국민에게 주권을 이양한 것이라는 독특한 국민주권론을 바탕으로 민주공화제와 법치주의를 지향했다.
상이한 결론이 도출된 이유는 무엇일까. 이를 알아보기 위해서 우리 조는 특히 시비가 엇갈리는 상해시기 임시정부(1919~1932)를 중점으로 그들의 활동과정을 알아보고, 같은 시기 식민지를 겪고 있었던 다른 나라의 독립운동 과정을 비교하면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다시 돌아볼 기회를 갖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