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장각에 보관했으나 현재 조선시대 의궤는 규장각, 장서각, 일본 궁내청, 파리국립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국왕과 관련된 의궤에는 『태실의궤』가 있는데 탯줄을 귀히 여기는 그 당시 사람들의 생각이 담겨 있는 예식이다. 태는 잘 보관하여 전국의 명당에 매장하고 태실을 만들어 관리했다. 태
규장각 문신 정약용이 동서양의 기술서를 참고하여 만든 「성화주략(1793년)」을 지침서로 하여, 재상을 지낸 영중추부사 채제공의 총괄아래 조심태의 지휘로 1794년 1월에 착공에 들어가 1796년 9월에 완공하였다. 축성 시에 거중기, 녹로 등 신 기재를 특수하게 고안·사용하여 장대한 석재 등을 옮기며
규장각에, 분상용은 의정부, 춘추관, 예조등 국가 전례를 관장하던 기관과 서울, 지방의 사고(史庫)에 분산ㆍ보관되었다.
우선 책의 제목이 굉장히 마음에 들었고, 잘 와 닿았다. 제목만 보고도 이 책이 나에게 무엇을 말해줄지, 그리고 의궤가 어느 정도의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의궤에 대해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는 권6의 영인본 중, 1장부터 13장까지의 시이다.
2. 두시의 언해 사업
두시의 유교적이고 우국적인 성향은 조선의 국시와도 합치되어 과거의 과제로 자주 출제 되었으며, 또한 한시의 모범도 되었기 때문에 한문학의 대중화를 위해 번역을 하게 됨.
1)초간본은 세종(1443년) 때 착수하
1.역사적배경
창덕궁 후원은 창덕궁이 조선의 이궁으로 건립된 이듬해인 1406년에 조성되었다. 이곳은 왕과 왕실 가족의 휴식공간이었지만 다양한 목적으로 활용되었다. 정조(1752~1800)는 1776년에 부용정 맞은편 어수문 뒤에 주합루를 건립하고 1층에는 왕실 도서관인 규장각을 설치했다. 후원에서 가장
있는 고려판이 유일본이다. 1930년 일본의 육덕재단(育德財團)에서 존경각의 전적 가운데에서 선본(善本)을 가려 영인본을 간행할 때에 『졸고천백』도 영인되어 현재 규장각 도서에 있다. 『졸고천백』은 1973년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에서 영인하고 간행한 『고려명현집 2』에 수록되어 있다.
규장각 출신 노론 계열과 일부 소론 계열로 제한되어 있었다. 세도가문에 대한 견제기능은 노론 정치집단 안에서는 일부 산림의 활동, 다른 붕당 차원의 견제운동은 재야 남인의 영남만인소 정도였다. 정치세력 측면에서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세도정치기의 과거급제자들은 당상관이상으로 올라갈
규장각 문신인 남공철의 편지를 받았다. 내용인 즉 정조가 당시 타락한 문풍을 바로잡겠다는 취지로 이른바 ‘문체반정’을 일으켰는데, 이는 당시 유행하는 소설식 문체인 ‘패사소품체’를 배격하고 순정한 고문으로 돌아가자는 것이었다. 여기에『열하일기』가 원인으로 지목됐다. 문단에 새로운
내용을 인정하며 칭찬하였는데 당대의 문장가인 정만조는 “우리나라의 야사 및 풍속 연구에 없어서는 안될 귀중한 문헌적 가치를 지녔다”라고 평가하였다. 해동죽지는 현재는 규장각도서와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황순구가 편저한 해동운기(海東韻記)에도 일부가 수록되어 있다.
하급 관리에 임용하였다. 1779년 3월 박제가는 규장각의 검서관으로 임명되었고, 후에 부여 현령, 오위장·영평 현령 등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그는 보수적 집권파의 눈 밖에 나면서 1801년 경원으로 유배당했고, 1805년 10월 박지원의 죽음을 애통해 하다가 병석에 누운 뒤로는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