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제가의 실학적 사상(박제가 산문선-궁핍한 날의 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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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박제가의 실학적 사상(박제가 산문선-궁핍한 날의 벗)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1. 박제가의 생애와 성장과정
2. 박제가의 성격
3. 박제가의 벗들

Ⅱ. 본론
1. 당시의 문제점들에 대한 해결 방안
(1) 건전한 소비의 장려
(2) 상공업의 활성화와 중국과의 통상
(3) 신분제도의 개선
2. 북학의 필요성과 의미
(1) 북학의 필요성
(2) 북학의 의미
3. 박제가의 시론
(1) 다양성의 추구
(2) 조화와 개성의 존중
(3) 변화와 발전의 논리
(4) 시인(인간)과 자연의 관계 - 제(際)

Ⅲ. 결론
- 박제가 사상의 의의와 한계
본문내용
Ⅰ. 서론

1. 박제가의 생애와 성장과정

박제가는 1750년 11월5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밀양 박씨이며 아버지는 부승지(副承旨)를 지낸 박평(朴坪·1700∼1760)이었다. 그에게는 이미 제도(齊道)라는 아들이 있었으나 그의 어머니와 사이에 제가를 낳았다. 11세 때 부친을 잃고 홀어머니 슬하에서 가난하게 자랐다. 박제가는 자(字)를 재선(在先)·차수(次修)·수기(修其), 호(號)를 초정(楚亭)·정유(貞 )·위항(葦杭)이라 했다.
그의 유년기에 대해 ‘어릴 때부터 글을 좋아해 읽은 책은 반드시 세 번씩 베껴 썼고, 입에는 늘 붓을 물고 있었다. 변소에 가면 그 옆 모래에 그림을 그렸고, 앉아서는 허공에 글쓰기를 연습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스스로도 ‘내가 처음 글을 배운 것은 막 젖 먹던 때였지’(我初學書尙哺乳)라는 시구를 남겼다. 어려서부터 총명해서 시(詩)·서(書)·화(畵)에 능했던 그는 19세 때에는 박지원(1737~1805)의 문하생으로 들어가 실학을 익혀 실학자로 성장했다.
문학에 대한 그의 재능은 특출해서 그의 나이 26세 때인 1776년에 이덕무(1741~1793), 유득공(1749~1807), 이서구(1754~1825)가 함께 쓴 시집 『건연집』이 청나라에 소개되어 ‘조선의 시문 4대가’의 한 사람으로 이름을 날리기도 했다.
1773년 3월 정조는 사회 모순을 완화하기 위하여 서얼허통법을 발표하고 서얼들을 하급 관리에 임용하였다. 1779년 3월 박제가는 규장각의 검서관으로 임명되었고, 후에 부여 현령, 오위장·영평 현령 등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그는 보수적 집권파의 눈 밖에 나면서 1801년 경원으로 유배당했고, 1805년 10월 박지원의 죽음을 애통해 하다가 병석에 누운 뒤로는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참고문헌

딘행본

· 박제가, 『궁핍한 날의 벗』, 안대회 옮김, 태학사, 2000.

논문

· 김형찬, 「박제가 실학 사상의 철학적 기반」, 『철학연구』20, 1997.

· 김준·오세영, 「박제가의 유통·통상론 연구」, 󰡔해양한국󰡕, 2004.

· 이철승, 「박제가의 철학 사상에 나타난 비판 정신과 반성리학적 경향」, 『범한철학』 25, 2002,

· 정일남, 「박제가 시미론 연구」, 『韓國漢文學硏究』39, 2007.

· 정일남, 「박제가의 제의 시론」, 『韓國漢文學硏究』28,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