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좌수영 관내에 있는 발포에서 부대장격인 수군만호가 됨
*발포: 전라도 고흥군 도화면 발포리
*수군만호: 수군 조직은 수사 밑에 첨사와 만호라는 직 책이 있었음. 만호는 종4품
1582년(선조 15)
1월
38세
군기 경차관(조사관)인 서익이 발포에 와서 군기를 보수하지 않았다고 상부에 보고하여 수군만호
전라좌수영 예하의 발포만호(萬戶: 종4품)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발포만호로 근무하던 1582년 이순신은 군기(軍器)를 점고하러 온 경차관이 군기를 보수하지 않았다고 장계하여 파직된다. 발포만호에서 파직된 지 4개월 만인 1582년 5월에 다시 훈련원 봉사에 복직되었다. 다음해인 1583년 7월에는 함경남
2.축제 내용 및 분석
1)한산대첩
이순신 장군이 1592년 음력 7월5일 전라 좌·우도와 경상도의 수군을 통합하여 56척의 전선으로 합동함대를 편성, 7월7일 당포항에 정박하여 적정을 살피던 중 견내량에 왜선 70여척이 활동 중임을 확인하였다. 7월8일(양력8월14일) 이른 아침 거북선을 앞세운 함대를 발
전라우도 수군절도사 이억기(李億祺), 충청수사 최호(崔湖) 등과 함께 전사하였다.
이순신이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기용되었고, 이순신은 명량대첩(鳴梁大捷)에서 일본전선을 대파하였다. 그리고 제해권을 되찾게 되었다.
한편 이순신의 조선수군은 명나라 진린(陳璘) 휘하의 수군과 함께 일본군
왜선들을 쇠줄로 격침시켰다고 한다.
물살이 빠른 울돌목에서는 학익진법도 소용이 없었다. 잘못하다만 물살에 휩쓸려 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지주민들은 가장 폭이 좁은 진도와 해남 우수영에 쇠줄을 연결해서 당겨 왜적을 격파했다고 하고 실제로 쇠사슬을 묶었던 고리가 남아있었다고 한다.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달랐다. 그는 이미 여수지방에서 거북선을 건조하여 일본의 침략에 대비하였던 것이다. 그는 본영과 휘하 각 진의 전선을 동원하여 경상도 남해안으로 진출하였고, 연전연승하였다.
여기에 더하여 전직관료 유생층 무과출신 등이 대거 참가하였다. 이들은 직접 해상전투에 참전
9월 16일, 일본군 연합 함대는 어란진을 발진하여 벽란진으로 총출격하였다. 그러나 이순신의 유령함대는 또 사라지고 없었다. 벽란진에서 다른 곳으로 갈 수 있는 수로는 일본군이 장악하고 있는 남쪽과 조선의 수군 사령부가 있는 북쪽의 우수영 방면뿐이었다. 따라서 일본군은 대함대의 출격에 겁을
우수영으로 진을 옮긴 뒤 장병들에게 『必死卽生, 必生卽死(필사즉생 필생즉사)』라고 말하고 필승의 신념으로 적의 내습을 기다리고 있었다. 9월 16일 왜선 133척이 어란포를 떠나 명량으로 공격해오자, 12척의 전선과 군사를 정비하여 구루시마 미치후사(來島道總)와 도도 다카토라(藤堂高虎)가 지위하
(2) 이순신에 관한 일화
이순신 장군의 출생에 대해 이런 일화가 있다. 이순신 장군의 어머니인 변씨는 어느 날 밤 이상한 꿈을 꾼다. 돌아가신 이순신 장군의 할아버지가 꿈속에 나타나 《 우리 가문에 또 손이 날 텐데 이 손자는 앞으로 나라를 구할 큰 인물이니라. 손자가 태어나거든 이름을
전라도 관찰사 이광에게 발탁되어 전라도의 조방장(助防將)이 되었다. 이후 1589년(선조 22) 선전관과 정읍(井邑) 현감 등을 거쳐 1591년(선조 24) 유성룡의 천거로 절충장군·진도군수 등을 지냈다. 같은 해 전라좌도수군절도사(全羅左道全羅左道水軍節度使)로 승진한 뒤, 좌수영에 부임하여 군비 확충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