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 일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 1536-1598)가, 전국 제패를 눈앞에 두고 부하에게 피살된 오다 노부나가(직전신장: 1534-1582)의 뒤를 이어서, 전국을 장악하였다. 1587년 규슈(구주) 지역을 장악하고, 1590년에는 간토(관동) 지역을 제압함으로써 백여년간 지속된 전국 통일이 이
통하여 상면을 청하였으나 " 우리는 종친이라 당연히 만나야 하지만 전랑으로 있을 때만은 만날 수 없다 " 고 거절하였으니 이는 그의 청렴함을 단적으로 말해 주는 것이리라.
국경경비에 3년간 임하다가 훈련원을 거쳐 36세가 되던 해 전라도 발포만호(鉢浦萬戶)로 임명되어 포구를 수비하셨다.
Ⅰ. 이순신의 출생과 가족관계
이순신 (李舜臣, 자는 여해 汝諧)은 1545년(인종 1) 3월 8일 (양력 4월 28일)* 자시(子時, 밤 11시˜새벽 1시)에 당시의 한성부 건천동(乾川洞)에서 출생하였다. - 건천동은 지금의 서울특별시 중구 초동 동쪽의 '마른내길' 근방이며, 그가 탄생한 집터는 현재의 인현동 1가 40
전라우수영 근방에 주둔했을 무렵 피난 다니는 배 300여 척이 몰려있는 것을 발견하기도 했다. 산골에는 유랑민이 더 많았다. 이들은 자기 고장에서 농사를 짓지 못하고 떠돌이생활을 했다. 조정에서는 일이 있을 때마다 백성들에게서 양곡을 염출했고 일본군과 명군 가릴 것 없이 시도 때도 없이 양곡
전라우수영에서 부터 점점 경상으로 향하며 숨어있는 적들을 소탕하고 광양만으로 나아간다. 이순신은 광양만에 도착해 명의 육군의 선제공격을 기다린다. 하지만 명의 육군은 이미 적들과 협상을 하여 공격하지 않았고, 적들은 황급히 달아날 준비를 하고있었다.
그러다가 명나라의 진린이 왜적의
우수영은 해상에서 제대로 싸움조차 하지 못한 채 패하였다.
전라좌수영의 수군절도사로 있던 이순신은 경상우수영으로부터 왜군의 침입보고를 받자 곧 출동하여, 옥포의 첫 해전에서 승리를 거둔 후 당포·당항포·한산도·부산 등지에서 계속 큰 전과를 거두었고, 특히 한산도 앞바다의 해전을 진주
우수영에서 고하도 쪽으로 영을 옮긴다. 이곳에서 본격적인 무기제조와 전법의 훈련이 시작된다. 무기 제조창을 설치하고 대장장이들로 하여금 농기구가 아닌 총통을 모방하여 똑같이 만들게 하고, 밑에서 기어서 올라올 적에 대비하여 창이아닌 자루가 길고 날이 넓은 낫인 장병검을 제조하여 본격적
전라좌수영 거북선은 노가 한 편에 8개씩 16개이고, 경상우수영 거북선은 노가 10개씩 20개로 되어있다. 지금부터 약 400년 전 충무공에 의해 탄생한 거북선은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큰 자랑거리로 알고 있으며 우리 배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외국인들도 격찬하는 전함이다.
그러나 너무
수군 만호가 되어 전남 고흥군 발포로 감.
*1582년(38세) 정차관으로 발포에 온 서익의 모함으로 만호직에서 파면됨.
*1586년(42세) 유성룡의 추천으로 두만강 가에 있는 조산보 만호로 감.
*1591년(47세) 유성룡의 추천으로 전라 좌수사가 됨.
*1592년 1월, 나대용의 도움으로 철갑선인 거북선을 만듬.
명량대첩을 기리는 축제로, 2005년 전라남도 해남군이 ‘명량대첩제’라는 이름으로 축제를 개최하기 시작하였다.
해마다 10월 초순, 3일간의 일정으로 명량대첩 기념관광지인 해남군의 우수영국민관광지와 명량대첩 현장인 울돌목(명량해협) 근처에 있는 진도군의 녹진국민관광지 일원에서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