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화론자들은 기원전 108년에 한군에 투항하였다. 왕자인 長도 투항하였고 주화론자인 參이 자객을 시켜 우거왕이 살해하였다. 그래도 중신인 成己가 최후까지 저항하여 왕검성이 함락되지 않자 왕장인 長이 성안 사람들을 부추켜 성기 역시 살해하였다. 그리하여 조선은 무너지고 말았다.
당시 고조
주화론과 주전론이다. 조선은 1627년 이미 후금의 침략을 겪었다. 그러나 9년 뒤의 병자호란에 제대로 준비하지 못했고 그 결과 저항 한 번 못하고 파죽지세의 기세로 몰려오는 후금의 팔기군에 쫓겨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도망갔다. 능력은 없으면서 쓸데없이 자존심만 셌던 조선의 지배층은 일본에 의
주화론을 배척하고 끝까지 주전론을 주장하다 인조가 항복하자 파직되었다. 1639년 청나라가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요구한 출병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청나라에 압송되어 6년 후 풀려났다. 그리고 그는 효종이 즉위하자 북벌을 추진할 때 북벌군의 이념적 상징으로 불렸다.
3.예화
화의에 반대
주화론자보다는 척화론자가 강하여 청나라의 요구를 계속 묵살하였다.
12월 2일 이런 조선의 도전적 태도에 분개한 청나라 태종은 청, 몽골, 한인으로 편성한 10만 대군을 스스로 거느리고 수도 선양을 떠나, 9일 압록강을 건너 쳐들어왔다. 의주부윤 임경업은 백마산성을 굳게 지켜 청군의 침입에 대비
주화론과 후금과의 전쟁을 감행하자는 주전론으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여기에서 가장 중심에 서야 할 인물은 바로 국왕 인조이다. 최고 통치자인 국왕이 중립에 서면서 양측의 의견을 적절히 조율하여 외교 정책을 추진해 나가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인조는 외교정책의 태도에 있어서 변덕스러운 모습
주화론) → 리홍장의 구미열강의 개입 희망(시간 지연) 북양 육해군은 리홍장 개인의 사병과도 같은 정치적 기반이었기 때문에 리홍장은 일본의 군사력으로 미루어 패배할 전투에 자신의 정치적
목 차
Ⅰ. 청일전쟁
1. 1890년대 이후의 상황
2. 전쟁의 전개
⑴ 조선에서의 전쟁도발
⑵ 청
『남한산성』에서는 인조와 주전론의 대표격인 김상헌, 주화론의 대표격인 최명길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형성되어 간다.
최명길은 청 황제에게 항복하는 것은 자존심이 상하고 굴욕적인 것이나, 현재 상황에서 청을 이길 수는 없기 때문에 굴욕적이더라도 자존심을 잠시 버리고 살아남아 복수를 함이
1. 병자호란의 배경
여진족은 오늘날 만주와 연해주 근방에 머물러 살고 있었다. 그들이 세운 금나라는 몽골의 침략으로 멸망한 후 통일된 세력을 형성하지 못하였으며 16세기 중엽 아이신 교로 누르하치가 숙신, 말갈, 여진을 규합하여 16세기 말에 이르러서는 이들을 통일하기에 이른다. 한편 임진왜
제 1단원. 선사 시대~고조선 시대
01. 선사 시대의 생활
[1] 구석기 시대
(1) 시기 : 약 70 만 년 전부터 시작
(2) 생활 모습
1) 도구 : 뗀석기(주먹도끼/찍개/긁기/슴베찌르기 등)/짐승의 뼈로 만든 도구 등
2) 경제
- 수렵/채집 등으로 식량을 구함.
- 불을 이용하여 음식을 익혀서 섭취하기 시작
3) 주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