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의 역사 레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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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청동기 문화의 발전과 함께 군장이 지배하는 사회가 출현하였다. 이들 중에서 세력이 강한 군장은 주변의 여러 사회를 통합하고 점차 권력을 강화하여 갔다. 가장 먼저 국가로 발전한 것은 고조선이었다. 단군 왕검에 의하여 건국된 (B.C.2333) 고조선은 요령지방을 중심으로 연맹왕국으로 성장하였다.
전국 7웅중에서 가장 강한 연이 왕을 칭하면서 그 동쪽 땅을 공략하려 하자 고조선의 候도 왕을 칭하면서 군사를 일으켜 연을 칠 계획을 세웠다. 비록 이 계획은 고조선의 대부인 禮가 간하여 중지되고 말았으나 어떻든 이 같은 사실은 고조선이 연맹왕국으로 성장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당시 중국인들이 고조선은 교만하고 잔인하다고 기록하고 있는 데 이로 미루어 보아 고조선이 강대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고조선은 요하를 경계로 연과 대립하였다.
기원전 4세기초 요동으로 침입하는 연의 세력에 밀리기 시작하였다. 연의 동방 침략은 소왕때 유능한 장수인 진개에 의해 크게 진전되었다. 그는 기원전 300년을 전후한 시기에 요하 상류에 근거를 둔 東胡族을 원정하면서 고조선의 경내로 쳐들어 왔다. 당시 청동기를 소유한 고조선은 철제무기를 소유하였던 연을 당해낼 수 없었고 서방 2,000리의 땅을 빼앗기게 되었다.
연이 진에게 멸망하자 요동 지역은 다시 진의 수중으로 들어갔고 진이 중국을 통일한 후 만리장성을 건설하여 요동군에 대한 지배를 강화하자 고조선의 부왕은 진이 내습할 까 두려워 진에 복속을 청하였는 데 다만 朝會하는 것만은 거부하였다고 한다. 그러면서 고조선에서는 철제무기를 받아들여 국력을 강화하려 노력하였고 왕권을 강화시켜 왕위 세습을 이루었다. 상, 대부, 장군등의 관직도 마련하여 국가 체제를 재정비하였다.
진이 통일한 지 10년만에 멸망하고 한이 건설되었다. 한고조는 동향 출신의 노관을 옛 연의 땅에 제후왕으로 봉했으나 진처럼 강력한 정책은 펴지 않았다. 그리하여 고조선과 진과의 국경은 패수로 정하였다. (패수는 현재 어디인지 모른다. 청천강으로 보는 견해와 압록강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또한 고조선과 중국 세력 사이에 空地를 설정하였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고조선은 점점 공지를 장악해갔다.
많은 유이민들이 고조선으로 넘어왔다. 이들을 점령한 空地에 안치하였다. 만리장성 축조 때부터 현지인들이 동원을 기피하여 고조선 국경선으로 몰려오기 시작하였는 데 몇 만명을 헤아릴 정도 였다고 한다. 그 뒤 고조선에는 또 한 차례의 유이민 집단이 흘러들어 오는 계기가 발생하였다. 연왕에 책봉되었던 노관이 漢 조정에 오해를 사서 흉노 땅으로 망명하였다. (기원전 195) 이 때 연 지방이 漢軍에 점령되고 말았는 데 이렇게 정국이 크게 뒤바뀌게 되자 연지방은 매우 소란스러워 졌고 그 곳에 살던 사람들 가운데 고조선으로 망명하는 자가 많았다. 그 중 위만이라는 자가 무리 1,000여명을 이끌고 고조선으로 들어 왔다.
위만은 처음에 준왕에게 고조선의 서쪽 변경에 거주할 것을 청하여 허락을 받았으며 그 뒤에 준왕의 신임을 받아 博士직에 임명되었고 땅 100여리를 받고 서쪽 변경을 수비하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이 때, 위만은 그 곳에 거주하는 이주민 세력을 통솔하게 되었고, 그것을 기반으로 하여 자신의 세력을 점차 확대하여 나갔다. 그 후, 위만은 중국이 쳐들어 온다는 허위 보고를 하고 宿衛을 하러 수도인 왕검성에 들어오는 척하면서 입성하여준왕을 몰아내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기원전 194)
위만은 요동 태수를 통해 형식적으로 한에 조공을 바치되 실제로는 자주국 으로서의 지위를 인정받는 外臣의 관계를 맺었다. 이같은 관계를 얻는 대신 兵器와 재물을 받고 그 것으로 주변 지역을 정복하여 청천강 이남과 한강 이북 강원도 일부까지 지배하였다.
한 문제 때 (기원전 179-157) 장군 진무(陳武)등이 조선과 남월이 병력을 갖추고 중국을 엿보고 있으니 이를 치자고 주청한 것으로 보아 아마 요동 지역도 넘볼 정도로 세력이 강성해 진 것 같다.
위만 왕조의 고조선은 철기 문화를 본격적으로 수용하였다. 철기를 사용함으로써 농업과 무기 생산을 중심으로 한 수공업이 더욱 성하게 되었고, 그에 따라 상업과 무역도 발달하였다.
우세한 무력을 바탕으로 활발한 정복 사업을 전개하여 광대한 영토를 차지하였다. 위만의 손자인 우거왕 때 그 세력이 한충 강대하였다. 그는 지리적 이점을 이용하여 예(濊)나 한강 이남의 진(辰)이 중국(한)과 직접 교통하는 것을 금지 하고 중계무역의 이득을 독점하였다. 이 같은 행동은 漢과 위만이 맺은 外臣과의 관계 규정에 어긋나는 것이었고 예와 진이 한나라에게 고조선을 쳐줄 것을 요청할 정도로 국력이 강성해지자 한은 고조선에 대해 두려워하였다. 더구나 한은 몽고에서 위만 지역까지 뻗어 오는 흉노가 위만 조선과 연합하여 받게 될 위협을 두려워 하였다.
한 무제는 濊의 추장인 남녀가 고조선을 피해 28만명을 데리고 투항하자 예의 땅에 창해군을 설치하여 위만을 위협하는 전초기지로 삼았다. 그러나 창해군까지의 교통상의 문제등 여러가지로 관리하기 어렵자 漢은 창해군을 포기하고 대신 우거왕의 태도를 고치고 흉노와의 연합을 사전에 봉쇄시키기 위해 섭하를 사신으로 파견하였다. 그러나 우거왕은 중국의 제의를 거부하였다. 그러자 섭하는 귀국 길에 패수에서 자신을 호송하였던 고조선의 비왕을 살해하고 도망쳤다. 그 후 섭하가 조선 국경 가까이 요동 땅에 동부도위로 임명되어 오자 우거왕은 사람을 보내 살해 보복하였다. 이를 계기로 한 무제는 수륙 양면으로 쳐들어 왔다.
고조선은 1차 접전에서 대승을 거두었고 한나라에서 화의를 요청하였다. 그러나 화의 교섭이 결렬되자 다시 공격이 시작되었다. 이 후 약 1년간에 걸쳐 한과의 전쟁이 계속되자 고조선의 진영에서는 화의론을 주장하는 자가 대두되었다. 우거왕이 계속 싸울 것을 독려하자 조선상 역계경(曆溪卿)은 남쪽으로 망명하였고 일부 주화론자들은 기원전 108년에 한군에 투항하였다. 왕자인 長도 투항하였고 주화론자인 參이 자객을 시켜 우거왕이 살해하였다. 그래도 중신인 成己가 최후까지 저항하여 왕검성이 함락되지 않자 왕장인 長이 성안 사람들을 부추켜 성기 역시 살해하였다. 그리하여 조선은 무너지고 말았다.
당시 고조선을 공격했던 한의 두장수는 전쟁이 끝나자 전쟁 실패의 책임을 물어 한사람은 평민을 강등되었고 한사람은 극형에 처해졌다. 이로서 고조선의 멸망은 한의 공격으로 말미암아 일어났다고 보기보다 내분에 의해 무너졌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