隋煬帝)와 당태종(唐太宗)의 고구려 원정 때에는 다같이 계성( 城)을 그 원정의 전진기지로 삼았고, 당태종은 고구려에 패한 뒤 전몰장사(戰歿將士)의 넋을 애도하여 민충사(憫忠寺:지금의 베이징 외성에 있는 法源寺의 전신)를 건립하였다. 오대(五代)에 이르러 요(遼)나라는 938년에 이곳을 부도(副都)
煬帝)의 치세와 수(隋)의 멸망 원인
1) 양제(煬帝)의 치세
양제의 '양(煬)'이라는 글자의 뜻 자체가 '예를 버리고 민심을 멀리한다' 또는, '하늘에 거역하고 민을 학대한다'라는 뜻의 시호로서, 악한 군주라는 의미이다. 양제는 그 제위에 오르는 상황이 도덕적 지탄을 받고 있다. 그것은 철저한 이중생
수나라 말기 내란이 한창이던 617년, 진양(晉陽:太原)에서 반란진압을 하고 있던 태원 방면 사령관 이연은 둘째아들 세민(世民) 등과 더불어 거병(擧兵)하여 장안(長安)을 점령하고, 618년 수(隋)의 양제(煬帝)가 반란군의 우문화급(宇文化及)에게 살해되자 양제의 손자 공제(恭帝)를 협박하여 선위(禪位)받
隋)나라 양제(煬帝)의 폭정으로 내란의 양상이 짙어지자, 수나라 타도의 뜻을 품고 타이위안(太原) 방면 군사령관이었던 아버지를 설득하여 군사를 일으켜, 장안을점령하고, 당나라를 수립하였다. 그뒤 군웅을 평정하고 국내 통일을 실현시킨 것은 20세 안팎인 그의 활동에 의한 것이며, 이를 질투한 형
隋)나라의 양제(煬帝)가 고구려 원정을 결의하고 612년 고구려를 쳐들어왔는데 을지문덕장군은 수나라군대에 맞서 지금의 청천강인 살수(薩水)에서 이른바 <살수대첩>을 통해 결정적인 타격을 입혀 격퇴하였습니다. 그 뒤 수양제는 613, 614년, 617년 3차례나 침입하였으나 거듭 패하여 이 전쟁은 수나라
隋) 양제(煬帝, 재위 604∼618)에 맞서 타이위안[太原]에서 반란을 일으킬 때부터 그를 지원하여 당 건국에 큰 공을 세웠고, 당이 건국된 뒤에 원종공신(元從功臣)으로 대우를 받으며 공부상서(工部尙書), 이주(利州, 지금의 四川 廣元)와 형주(荊州, 지금의 湖北 江陵) 도독(都督) 등을 지냈다. 그는 620년에
隋)나라 양제(煬帝)는 해마다 정월이면 ‘백희’를 대대적으로 연희(演戱)케 하는 행사를 벌였다. 또한, 당(唐)나라 현종(玄宗)은 이원(梨園)을 설치하고 300명에 달하는 궁정 전속배우를 양성하였는데, 극단(劇壇)을 뜻하는 ‘이원’이라는 말은 여기에서 비롯하였다.
당대(唐代:618∼907)에는 《대면(代
隋) 나라의 양제(煬帝)에 보낸 국서 日出(ひいづるところ)天子、日天子に書を致す(해가지는 곳의 천자에게 글을 올립니다)라는 외교문서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일본의 기록에 의하면 日本이라는 한자가 등장한 것은 701년 완성된 다이호(大寶) 율령 일본 나라 시대(奈良時代) 초기인 다이호(大寶)1년(70
隋)나라 양제(煬帝)는 북경(北京)에서 항주(杭州)까지에 이르는 대운하를 건설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총 길이1,764km에 달하는 ‘경항(京杭)대운하’이며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인공 운하이기도 하다. 대운하가 발달되면서 지역 간 해상운송이 더욱 활발해 질 수 있었다.
2. 천문학(天文學)
중국은
隋初의 일련의 사회경제에 대한 개혁 정책은 高熲의 輸籍法을 골격으로 하였다. 다만 수적법이 시행되어야만 했던 배경에 대해서는 <<隋書>> <食貨志>와 <<通典>> <食貨>가 약간 다른 내용을 전하고 있는데 <<수서>>에는 북제의 구경인 산동에서 세역을 기피하는 자가 많았고 수적법이 주로 지방관리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