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는
이러한 불만세력을 잠재우기 위해 금관가야 마지막 왕인 구형왕
(김유신의 증조부)의 후손들을 진골 귀족으로 편입시켜 가야인
들의 반발을 희석했으며 신라인과 가야인의 사상적 통합을 이뤄
냈다. 구형왕의 손자인 김유신은 실제 신라의 삼국통일을 이룩하
는데 큰 공을 세웠다.
김유신과 김춘추의 지지를 받아 여왕으로서 즉위할 수 있었다. 진덕여왕은 선덕여왕 말년에 일어난 비담의 난으로 즉위 했다고 볼 수 있다. 비담의 난 이란, 수많은 귀족들이 여왕의 통치를 전면부정해 일어난 사건이다. 이때 선덕여왕이 죽고 그 후 숨가쁜 상황 속에서 신라는 두 번째 여왕을 맞이하게
김유신공의 능에 가서 잘못을 사과하고 김유신공을 위해서 공덕보전(公德寶田) 30결(結)을 취선사(鷲仙寺) 경북 경주에 있던 절.
에 내려서 공의 명복을 빌게 했다. 이 절은 김공이 평양을 토벌한 뒤에 복을 빌기 위하여 세웠던 절이기 때문이다.
이 때, 미추왕의 혼령이 아니었던들 김공의 노여움을 막
김유신 등 28명의 장수를 동원하고 당나라에서 파견된 병력과 함께 백제부흥군의 본거지인 주류성을 함락하고, 흑치상지와 지수신이 최후까지 저항하던 임존성을 정벌함으로써 백제부흥운동을 종식시켰다.
백제의 잔존세력을 평정한 문무왕은 당나라와 연합하여 이번에는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당나
김유신 장군이 잠든 서악권에서 인기리에 방영된 드라마 <선덕여왕>의 감동을 되살려 보자!
-> 신라 삼국 통일기의 명장
김유신의 무덤. – 사적 제21호
► 전망이 좋은 구릉 위의 울창한 소나무 숲 속에 자리 잡고 있음.
► 형태: 지름 30m인 원형
► 봉분 둘레에는 둘레돌을 두르
김유신과 김인문 등에게 분급한 마거(馬)처럼, 왕실로부터 분급받은 경우도 있으나 귀족이 자신들의 권력과 재력을 이용하여 만든 경우도 많았다.
2) 식읍
: 통일신라 귀족의 경제기반으로 식읍이 있었다. 식읍에는 일정한 지역을 분급하는 경우와 일정한 호(戶)를 수여하는 경우가 있었다. 일정한 지역
. 이들 세력을 등에 업고 권력을 유지하였다고 해도 무방하다. 선덕여왕, 진덕여왕 때에는 김춘추, 김유신 등 뛰어난 측근들이 여왕을 보좌했다. 그리고 비담을 난을 비롯한 많이 난국을 평정하는데 도움이 됐다. 김유신이 비담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천신에게 제사를 드리며 한 말을 살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