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촌 너븐숭이 4.3기념관
Ⅰ. 들어가며
박물관이란 말에 사전적으로 접근해 보자면 ‘고고학적 자료, 역사적 유물, 예술품 그 밖의 학술 자료를 수집ㆍ보존ㆍ진열하고 일반에게 전시하여 학술 연구와 사회교육에 기여할 목적으로 만든 시설’(네이버 백과사전)이다. 발굴해 낸 과거의 유물들을 전시함
북촌 사건’. 마을 인근에서 군인들이 기습받은 데 대한 보복으로 조천면 북촌리를 모두 태우고 이 튿날까지 주민 400명 가량을 집단총살
6.7- 무장대 총사령관 이덕구 사살
1950.6.25- 한국전쟁 발발
8.20- 모슬포경찰서 관내 예비검속자 252명이 송악산 섯알오름에서 집단총살됨. 1956년 5월
모습에서 순덕이가 정말 착하다는걸 느꼈다.
4) 몽실은 역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p.60)
- 어린나이에 새어머니를 맞아야 한다는 것은 너무 가혹한 현실인 것 같다.
5) 북촌댁은 꾸지람하지 않았다 (p.72)
- 북촌댁의 몽실이를 생각하는 마음이 느껴졌다. 새어머니인 만큼 더 잘해주려는 것 같다.
, 1954년 화재로 안채와 사랑채가 소실되고, 현재는 대문간채와 별당, 사당만 남아 있다. 많은 도서와 진귀한 골동품들이 그 때에 소실되었다고 한다.
□북촌댁 (중요민속자료 제84호)
북촌댁은 마을북쪽 99칸 집으로 불려졌으며, 사랑채, 안채, 별당채, 사당, 대문간채를 두루 갖춘 사대부 집이다.
북촌’과 일본화된 문명의 ‘남촌’을 가르는 차별의 상징이 되었다. 그러니 천변의 북촌 조선인 거주지역의 생활조건은 더욱 악화되었다. 그러나 청계천은 조선인에게는 여전히 빨래터요 야채 세척장이었다. 이 지역에는 계속 물장수가 돌아다녔고 아낙네들은 빨랫감을 들고 나왔다.
또 조선인에게
북촌으로 진출하는 신호탄이었으며, 해방 이후 지속된 정치 행정 중심과 상업, 금융 중심의 공간적 분화의 계기로도 자리매김한다. 조선총독부에서 경성부청을 거쳐 남대문에 이르는 광화문통과 태평통은 관아의 거리와 언론사의 거리로 성격지워졌고, 경성부청에서 조선은행앞 광장에 이르는 소공로
북촌사건’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한마을 주민 400명 가량이 2연대 군인들에 의해 총살당한 사건이다. 북촌 너븐숭이 위령성지를 갔다 왔는데 대학살이라고 표현되어 있었다. 너무 낳은 사람들이 죽어서 후손이 끊겨진 집안이 적지 않아서 한때 ‘무남촌’으로 불리기도 했다. 학살과 강요된 침묵, 그
북촌에서 노역을 하면서 “헛일이여, 헛일이여”하면서 일본 멸망을 예견한 사람도 있었고, 북촌리 학살 사건이 엠블란스차 안에서 즉흥적으로 결정된 것이라는 증언 등등 생생한 증언을 토대로 한 사회상을 볼 수 있었다.
구술사의 방법은 역사를 접근하고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특히 현대
소개
2023/03/27일 북촌에 위치한 어둠속의 대화를 다녀온 후 느낀 감상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번 체험은 아무런 정보 없이 다녀오라는 교수님의 말씀에 따라 혼자 티켓만 예매하고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어둠속의 대화는 저에게 매우 의미있는 체험이었습니다. 시각이 차단된 상황에서 다른 감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