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사회의 이해 -4 3 유적지 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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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제주사회의 이해
-4.3 유적지 보고서-
이 수업을 듣게 된 것은 친구에 권유로 같이 듣게 되었는데 수업이 시작 한지도 벌써 한달이 넘어가는데 느끼는 것이 참 많은 수업이다. 내가 21년 동안 제주에서 살아 왔지만 제주에서 있었던 일이나 일어났던 일에 대한 관심을 가진 적이 없고 관심을 가져 보려고 한적도 없었다. 그래서 이 수업 수강하기를 잘 한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번에 4.3에 대하여 조사하면서도 내가 정말 내가 관심 없이 살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학생들을 보면 놀기 바쁘고 좋은 직장에 취직하기 위해 공부하느라 바쁘기 때문에 내가 볼 때에는 4.3 사건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별로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나 또한 학교 다닐 때 이런 사건이 있는 줄만 알고 유적지 같은 곳을 견학 할 때에도 아무런 생각 없이 둘러 보기만 했기 때문이다. 지금이라도 정확히 알고 알려야 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먼저 4.3 사건의 발달과 전개에 대하여 알아야 한다고 생각 한다. 1948년 4월 3일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일어난 민중항쟁으로, 이시기에는 민중항쟁이라고 말하지 않고 반란으로 또는 폭동으로 다른 지역에 알려졌다고 한다. 다른 지역 사람들은 제주도를 ‘빨간섬’이라고 부르며 공산주의자의 섬으로 알고 있었다고 한다. 국가의 권력에 의한 무차별 희생이 우리가 살고 있는 바로 이 땅에서 발생하였는데 지금 제주도민만이 아닌 연세드신 제주도민만이 안타까워하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 슬프다. 노무현 대통령이 직접 4.3 위령제에 참석하여 사과 뿐만 아니라 추도사를 하면서 그나마 위로를 드렸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의 대통령은 임기의 마지막 해인 올해에도 참여조차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일본 패망 후 한반도를 통치한 미군정 체제의 사회문제와 남한 단독정부수립에 반대하는 과정에서 일어났다. 미군정과 군정관리들이 이를 무력으로 진압하는 과정에서 많은 주민이 억울하게 희생당한 사건이다. 당시 제주도는 광복 후 일본군이 철수하고 외지에 나가 있던 제주인 6만 여 명이 귀환하였으나 이들은 직업을 구하지 못하여 생업을 영위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였다. 여기에 생필품부족과 콜레라 발병으로 인한 수백 명의 인명 희생, 극심한 흉년 등이 겹친데다가 일제에 부역한 경찰들이 미군정하에서 다시 치안을 책임지는 군정경찰로 변신하고, 군정관리들이 사리를 채우는 부정행위를 일삼는 등 여러 가지 사회적 문제점을 내표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1947년 3.1절에 경찰이 시위하는 군중에게 발포하여 관덕정과 도립병원 앞에서 6명이 사상되고 8명이 중경상 이상의 부상을 당하게 되는 ‘3.1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이 사건에 시작은 평화공원에 영상을 통해서 보게 되었는데 경찰한명이 말을 탄체로 가다가 아이를 쳐 놓고도 당당히 걸어가는데 이 모습을 본 주변 사람들이 화가나서 그 경찰에게 돌을 던지며 쫓아가다가 경찰이 총을 발포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 자리에서 즉시 사과 했다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평화공원에는 이런 사건의 발생부터 전개 과정 등을 자세하게 잘 볼 수 있게 해 놓았다. 4.3 견학을 가면 거의 이 곳을 많이 갔었는데 너무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이 곳에는 4.3 유골을 발견한 현장을 재연해 놓은 전시물등 다양한 전시물이 있었고 자신의 의견을 적는 곳 까지 생각하고 참여할 수 있게 되있어서 좋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4.3 위령제 시기에만 사람들이 많이 오지 그 시기 이외에는 사람들이 거의 가지 않는게 아쉬웠다. 제주도내 전체 직장의 95% 이상의 사람들이 경찰의 발포에 항의하여 ‘3.10 총파업’에 동참하였다. 이에 대하여 미군정은 경찰의 과오를 다스리기보다는 남로당의 선동을 분쇄하는 데만 주력하여 제주도 도지사를 비롯한 군정 수뇌부를 전원 외지인으로 교체하고, 경찰과 우익단체인 서북청년단 단원들을 대거 동원하였다. 1948년 11월부터 9연대에 의해 중산간 마을을 초토화시킨 강경 진압작전은 가장 비극적인 사태를 초래하였다. 강경 진압작전으로 중산간마을 95% 이상이 불타 없어졌고 많은 인명이 희생됐다. 4.3사건으로 가옥 39,285동이 소각되었는데, 대부분 이때 방화되었다.결국 이 강경 진압작전은 생활의 터전을 잃은 중산간마을 주민 2만명 가량을 산으로 내모는 결과를 빚었다. 이 무렵 무장대의 습격으로 민가가 불타고 민간인들이 희생되는 사건도 있었는데, 대표적인 피해마을은 세화, 성읍, 남원으로 주민 30~50명씩이 희생되었다. 9연대에 이어 제주에 들어온 2연대도 절차를 밟지않고 인명을 앗아가긴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공개적인 재판절차도 거치지 않은 채 즉결 처분을 자행했다. 대표적인 주민 집단총살사건인 ‘북촌사건’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한마을 주민 400명 가량이 2연대 군인들에 의해 총살당한 사건이다. 북촌 너븐숭이 위령성지를 갔다 왔는데 대학살이라고 표현되어 있었다. 너무 낳은 사람들이 죽어서 후손이 끊겨진 집안이 적지 않아서 한때 ‘무남촌’으로 불리기도 했다. 학살과 강요된 침묵, 그리고 울음마저도 죄가 되던 암울한 시대에 진실을 알게 되었다. 이 밖에 진상 조사 위원회에 신고된 자료에 의하면, 100명 이상 희생된 마을이 45개소에 이른다. 이런 가경 진압 작전의 책임자는 1차적으로 2연대장과 9연대장이지만, 보고서에서는 명시적으로 서청단원과 이승만 대통령, 미군정의 책임을 묻고 있다. 서청 단원들은 4.3사건 발발 이전에도 500~700명이 제주에 들어와 도민들과 잦은 마찰을 빚었고, 그들의 과도한 행동이 4.3사건 발발의 한 요인으로 거론되었다. 4.3사건 발발의 한 요인으로 거론되었다. 4.3 사건 발발 직후에는 500명이, 1948년 말에는 1,000명 가량이 제주에서 경찰이나 군인 복장을 입고 진압활동을 벌렸다. 서청의 제주 파견에는 이승만 대통령과 미군이 후원했음을 입증하는 문헌과 증언이 있다. 당시 이승만은 4.3사건 때문에 제주도의 2개 선거구가 무효화됨에 따라 선거자체의 정당성이 문제가 되고, 여순사건이 발발하여 이승만정권의 생존가능성이 국제적으로 의문시되었고, 유엔의 승인에 즈음하여 미선거구가 걸림돌이 되었으며, 김구나 김규식 등의 지도하에 통일운동이 활성화되어 정권의 정통성 상실이라는 위기를 맞고 있었다. 이에 초토화작전을 통하여 긴급히 4.3사건을 평정하고 재선거를 실시하여 정권기반을 강화하기를 노렸다. 실제로 이승만 대통령은 계엄령을 선포하고, 1949년 1월 국무회의에서 “미국 측에서 한국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많은 동정을 표하나 제주도, 전남사건의 여파를 완전히 발근색원하여야 그들의 원조는 적극화할 것이며 지방 토색반도 및 절도 등 악당을 가혹한 방법으로 탄압하여 법의 존엄을 표시할 것이 요청된다”고 발언하여 강경작전을 지시한 사실이 진상조사위원회의 조사에서 밝혀졌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전해진 인상은 이런 공식적인 것이 아니었다.
하루는 사무실에 갔더니 너도나도 경찰관이 되어 제주도에 간다고 야단들이었습니다. 이야기인즉, ‘제주도 4.3 사건을 진압하려면 사상이 분명해야 하는데 서울에서도 누가 좌익이고 누가 우익인지 구별키 어렵다. 그러니 사상적으로 믿을만한 사람들은 서청뿐이니 서청에서 경찰관을 선발한다’는 것이었지요
-김시훈(증언 당시 74, 표선면 가시리)의 증언, 제민일보 4.3 취재반, 4권, 1997, p156.
이미 정권의 힘을 얻고 입법, 사법, 행정의 3권 위에 군림하던 특권부라고 불리던 서북청년단을, 미군 정보부가 작성한 특별보고서 조차도 “극우 정치인사들이 지원하는 테러조직”이라 단언한 서청을 ‘빨갱이의 섬으로 규정한’ 제주도에 대거 내려보내기 시작했다는 것은 비극을 자초하는 일과 다르지 않았다. 이제 제주도민에 대한 좌/우의 구별은 무의미해졌다. 그들과 군인, 경찰은 자신의 맘에 들지 않는 모두를 죽였다. 같은 경찰도, 우익 단체 조직원도, 도지사도, 면사무소 서기도, 마을 이장도, 모두 특별한 재판도 없는 상태에서 죽어갔다. 그 뒤에는 변함없이 대통령 이승만이라는 존재가 있었다.
당시는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이승만이 우리를 이용했다고 여겨집니다. 당시 서청문봉제 단장은 이 대통령의 신임을 받던 측근 중의 측근이었습니다. 앞뒤를 가리지 않고 공산당을 없애야 한다는 명분 하나를 앞세워 현지 사정도 잘 모르는 대원들을 대거 투입한 것입니다. 국민을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집권욕만 생각한 것이지요. 이 대통령의 허락 없이 어느 누가 재판도 없이 민간인들을 마구 죽일 수 있는 권한이 있겠습니까. 이 대통령이 ‘죽이지 말라’고 했으면 제주도에서와 같은 학살사태가 있을 수 있습니까. 내가 살고 있는 가시리에서는 며칠 전에 집집마다 제사를 지냈습니다. ... 아무튼 학살의 총책임자는 이승만이 라고 생각합니다.
-김시훈, 같은 책, p153
이로부터 4.3사건이 발발하기 전까지 약 1년간 2500여 명이 구금되고 테러와 고문이 자행되었다. 수세에 몰린 남로당 제주도당은 무장투쟁을 전개하기로 결정하고, 1948년 4월 3일 350명의 무장대가 제주도내 12개 지서와 우익단체들을 공격하였다. 이들은 경찰과 서북청년단의 무자비한 탄압을 중지하고, 남한 단독선거와 단독정부 수림을 반대하고 통일정부를 수립할 것을 촉구하였다. 미군정은 경찰력과 서북청년단의 힘으로 사태를 수습하지 못하자 경비대에 진압작전 출동명령을 내렸다. 경비대와 무장대는 한때 평화적으로 사태를 해결하는 데 함의하기도 하였으나 우익청년단체가 일으킨 ‘오라리 방화사건’으로 무산되었다. 미군정은 지상과 공중에서 방화 현장을 입체적으로 촬영하여 라는 기록영화를 만들고, 이 사건을 무장대의 소행으로 조작하는 데 이용하였다. 1948년 5월 10일의 남한 단독선거에서 제주도는 투표수 과반수 미달로 무효처리 되었고, 다음달 23일에 재선거를 실시하려는 미군정의 시도도 수포로 돌아갔다. 이 과정에서 5월 20일 경비대원 41명이 탈영하여 무장대에 가담하였고, 6월 18일 경비대 연대장이 부하 대원에게 암살당하는 사건도 발생하였다. 이후 잠시 소강 상태에 놓였으나 1948년 8월 15일 남한에 대한민국이 수립되고, 다음달 9일 북한에 공산주의 정권이 수립되면서 남한의 이승만 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