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항 이후 서울의 도시발전 모습 개항~1940s도시계획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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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개항 이후 서울의 도시 발전 모습 - (개항~1940s)
도시계획법
1. 근대 서울 도시 계획 - 대한제국시기 - 도시개조사업
1896년 아관파천 후에 시작된 서울 도시개조사업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도시계획.
1) 아관파천 후 본궁으로 새로 건설된 경운궁(현 덕수궁) 대한문 앞을 중심으로 워싱턴 DC의 도로망과 공간구성을 본 떠 방사상 도로를 새로 만들어 기존의 도로들과 연결하였다.
2) 새로운 본궁을 중심으로 왕권의 권위를 상징하는 기념물들 - 원구단, 황제즉위 40주년 기념비각 - 을 건비하고 독립문(영은문 자리-프랑스 개선문을 본 떠 만듦) 및 독립관, 용산의 전환국 등 정치적 중요성을 가지는 구조물을 배치, 연결하였다. 또한 탑골공원, 파고다 공원 등 공원과 광장을 조성하였다.
3) 새로운 근대 문물을 도입 - 전차, 철도 등
근본적으로 이 계획에서는 궁을 교통의 기점이자 시선의 종점으로 하여 왕권(대한제국 수립 이후 황제권)의 절대성을 공간적으로 각인하는 서구 절대주의 왕정의 정신이 발견된다.
2.도심부 공간의 식민화 - 경성시구개수
시가정리라는 이름으로 대한제국의 사업과 별개로 도시개조 추진. 강제병합 이후 1912년부터 시작된 경성시구개수로 계승. 기존에 이 과정은 대한제국기 도시개조사업의 흔적을 지우고, 일제가 왕조의 수도 서울을 식민도시 경성으로 재편해간 과정.
1912년 안은 기존 서울의 도로망과는 무관한 종로-황금정(을지로)-본정(충무로)를 연결하는 남북도로 및 특히 을지로 중심의 방사상 도로망 계획을 포함하고 있었다.(A), 이는 단순한 도로정비 수준이 아니라 서울의 도로망 중심을 완전히 재편하겠다는 계획. 그러나 경운궁 중심의 기존 방사상 도로망이 남아 대한제국기 사업의 흔적이 그대로 있다.(B), 1912년 안은 대한제국과의 단절을 도모하는 한편 식민지배를 위한 이식의 일환으로 과격하게, 급하게 시도되었기 때문에 제대로 추진되지 못했다.
1919년 안을 보면 (a) 총독부 청사의 이전 계획이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원래 남산록의 통감부 청사를 사용했었다) 병합 직후부터 논의가 잇었던 총독부 신축은 1915년 신청사 부지로 유력하게 지목된 경복궁에서 ‘시정 5주년 기념 조선물산공진회’라는 대규모 박람회를 개최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이는 일제가 상징적으로 경복궁과 같은 조선왕조의 핵심 공간을 점령하는 계기. 공진회 준비 과정에서 경복궁의 많은 전각들이 훼손되었고, 그 자리는 공진회가 끝난 후 총독부 부지가 되었다. 식민지배의 거점이 본격적으로 북부지역으로 옮겨지기 시작했다. 황금정(을지로)중심의 방사상 계획이 사라지고 경복궁(총독부)를 기점으로 대각선 도로가 새롭게 추가되었다. 1920년대 들어선 경성부청(당시 충무로 1가)을 전 시가를 원으로 볼 때 중심 위치에 해당하는 현재의 서울시청 자리로 이전하였다. (b) 이 자리는 바로 경운궁을 측면으로 바라보는 자리, 병합 이후 경운궁과 그곳을 중심으로 한 방사상 도로망은 버려진 공간이 되었지만 그 자리는 여전히 경성의 중심, 부의 중심이었던 것이다. 경성부 신청사는 총독부가 준공된 얼마 후 완공되었다. 그리고 그 아래 남대문통 3정목에 위치한 조선은행 본점(c-구 한국은행 본점, 현재 화폐금융박물관)과 더불어 총독부-경성부-조선은행을 잇는 축이 식민지배의 중심축으로 완성되었다. 그리고 그 축을 기점으로 황금정(을지로), 본정(충무로) 라인을 통해 식민지의 부와 권력이 이동하기 시작했다.
남촌과 용산에 편중되어 있던 식민지 권력기관의 북진현상은 같은 시기 경성역의 신축을 통해 철도 교통 중심이 이동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혼마치를 중심으로 남촌과 용산에만 집중되어 있던 일본인 세력이 본격적으로 북촌으로 진출하는 신호탄이었으며, 해방 이후 지속된 정치 행정 중심과 상업, 금융 중심의 공간적 분화의 계기로도 자리매김한다. 조선총독부에서 경성부청을 거쳐 남대문에 이르는 광화문통과 태평통은 관아의 거리와 언론사의 거리로 성격지워졌고, 경성부청에서 조선은행앞 광장에 이르는 소공로는 사무소건축의 거리로 성장하게 된다. 광화문통과 태평통을 장악함으로써 그동안 낙후된 채 방치되어 있던 경복궁 주변 북촌의 가로망이 정비되고 경성역, 경성부청, 경성제국대학등이 일거 건설됨으로써 총독부가 병합 초기부터 야심차게 추진해온 식민지 행정 수도의 도시 경관 정비 사업이 일단락되었다
이러한 축에 있던 건물들은 지배 체제를 상징적으로 나타냈다. 일제는 풍수로 대표되는 한국의 전통적 공간 질서를 의도적으로 철저하게 파괴하려했다. 1925년 남산 조선신궁 완공, 1925년 경성부청 완공, 1926년 조선총독부 신청사 완공은 서울 시내 한가운데 ‘대일본’이라는 형상을 각인시키고 각각 경복궁과 덕수궁의 위세를 누르기 위한 것이었고, 조선의 호국신전격인 국사당이 있던 남산을 깎아 일본 혼의 상징인 조선신궁을 건설하고 신마치 유곽을 장충단 앞에 배치한 것이나 장충단에 벚꽃을 심어 일본인들을 위한 공원으로 만든 것도 같은 맥락이다
3. 도시계획법의 제정 - 조선시가지계획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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