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어자료에는 ‘ㅸ’ 는 분명히 존재하지 않는다. 훈민정음 17자 초성체계에도 포함되어있지 않아 있으나, 훈민정음체계에서 ‘ㅸ’은 순경음으로 규정되어 있다. <훈민정음>제자해에 “脣乍合而喉聲多也” 로 설명되어 있는 바와 같이 음가[β]를 가진 음소였다. 하지만 중국어의 순경음은 우리나
옛 땅이었으므로, 개성방언을 토대로 하여 형성된 중세국어에는 고구려어의 흔적이 남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7세기 후반에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하고, 통일신라시대가 10세기 초까지 계속되는 동안에 경주(慶州) 중심인 신라어의 영향은 점차 백제와 고구려의 옛 땅에까지 파급되었을 것이다.
국어의 상성이 현대국어의 장음이 된 것이 아니라 원래 상성은 장음이었다.
ㄹ. 성조는 16세기 말엽에 완전히 소멸되었다.
ㅁ. 입성은 높낮이와 아무 관련이 없다. 종성이 ㄱ, ㄷ, ㅂ, ㅅ으로 끝나는 음절은 모두 입성이며 동시에 평성, 거성, 상성 셋 중의 한 성조를 취한다.
사성
방점
훈민정음(
원칙이다.③향찰은 음절구조가 복잡하여 국어를 만족스럽게 표기하지 못했다.
(3) 훈민정음(訓民正音)①훈민정음은 세종 25년에 창제하고, 세종 28년에 반포된 독창성과 과학성을 가진 문자이다.②그러나 이 문자가 온 국민의 문자로서의 지위를 확립한 것은 19세기와 20세기의 교체기이다.
세기말까지 계속되었던 것이다. 그 결과 우리 민족은 입으로 말하는 언어와 글을 쓰는 언어의 불일치 즉, 언문이치를 오랫동안 가지게 되었다. 라틴어를 문어인 동시에 구어로 사용하였던 중세유럽과 달리 우리나라 문인들은 입으로는 국어를 말하고 글로는 한문을 썼다는 매우 특수한 의미에서 이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