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나라 사람들이 도쿠가와(德川) 시대 일본의 유학자 오규우 소라이(1666∼1728)를 안 것은 제법 오래 전의 일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다산 정약용이 이미 {논어} 주석 연구서인 {논어고금주}(論語古今註)에서 오규우 소라이의 {논어} 해석, 정확히 말하면 소라이의 {논어징}(論語徵)의 내용을 43차례에
논어고금주>의 <시경강의서>라는 글에서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독서는 뜻을 구별할 뿐이다. 만약 얻는 뜻이 없다면 비록 하루에 천권을 읽는다 하더라도 담벼락 보기와 같다. 비록 독서를 하여도 글자의 뜻을 훈고함에 밝지 않으면, 의미와 이치도 따라서 어두워진다.’ 또한 <기유아>에서도 ‘마구잡
논어고금주(論語古今注)』를 중심으로」, 한국학보, 1996, p86 - p89.
주자는 이선기후(理先氣後)의 형식을 따랐다.
2) 정약용의 이기론에 대한 입장
당시 조선은 주희의 성리학이 주류였는데 이 성리학을 가지고 퇴계학파와 율곡학파로 나뉘어서 서로 다투고 현실세계에 치중하기 보다는 오히려 교조적인
논어고금주(論語古今注)》 《맹자요의(孟子要義)》 등이 실려 있다.
* 목민심서 - 백성을 다스리는 관리의 몸가짐과 마음가짐을 밝힘. (백성을 잘 다스리는 자 - 자애롭고 절약해야 한다. 절약함을 목민관의 가장 큰 의무라 함.)
2. 시대적 배경
정약용이 살던 시대는 민중 소요의 시대였다. 관리들의
Ⅰ. 서론
조선시대의 성리학의 특징이 주로 내적인 반성과 성장을 추구해 현실적 정치와 관련이 적다고 본다면 서학의 개념이 도입되기 시작한 조선후기 실학의 개념은 말 그대로 실용성을 더해 현실정치에 도움을 주는 학문이라고 보여진다. 특히 실학의 집대성자로서 정약용의 학문은 오늘날 왜